<강은영 시민기자> 나의 삶, 나의 추억

시간의 흐름과 계절만큼 정직한 것은 없는 듯 유월인가 싶더니 벌써 칠월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칠월이 오면 민족시인 이육사님의 ‘청포도’ 라는 시를 떠올려본다. 칠월에는 내 아버지 기일도 있다. 공권력에 의해 수장(水藏)시킨 날이 칠월 십육일이었다.
 지난달은 보훈의 달이라 아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가족묘지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의 묘비도 언젠가는 충혼묘지에 모셔야 할 게 아닌가 싶어서다.

 비석을 세울 때만 해도 어머니는, 큰길가에 세워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수 있어서 아버지의 억울한 넋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곳에 모셨을 게다. 그 때만 해도 큰길가 맞은편에는 서귀포여고가 없었다. 독자 중 어느 분은 비명에 가셨으니 아버지 묘비는 충혼묘지 보다는 자식들이 추도비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귀띔도 해 주셨다. 허나 어디 그게 마음만 같을까. 예비검속 유족들과 함께 고발한 소장이 아직도 법원에 계속(繫屬)중이다. 언제면 내 아버지의 억울함도 풀려 충혼묘지에 모시든, 추도비를 세우든 해야 할 터인데…

 어느 전직 교장(윤○○)선생님은 내 졸필(拙筆)을 보고 격려의 전화도 걸어주셨고 내가 몰랐던 자료도 제공해 주셨다. 그 분은 예비검속에 구금 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고도 했다. 선생님은 또 서귀포에서 바른 소리 잘하는 분으로는 내 아버지와 내 작은 외삼촌(이○○)밖에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얀 치자 꽃 향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 꽃이 시들면 장마가 끝난다는데 올해는 마른장마인가보다. 습도는 높은데, 안개비라도 촉촉이 내렸으면 좋으련만.
 나는 가끔 학교 다닐 때 추억이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번져오곤 한다. 어린 시절 4․3을 겪었고, 6․25때 피난민까지 밀려와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보릿고개를 접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아들이 아닌 이유로 대학 진학은 아예 생각도 못 했던 시절이라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오빠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며 학교를 다녔으니 공부는 뒷전일 수밖에. 기초 실력이 없어 영어 수학은 무지에 가까웠다. 산이 거기 있으니 산에 올랐다고나 할까. 그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삼십 여명의 여자 동창들 중 고등학교 졸업생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서귀포에 남주 고등학교가 있었기에 나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부끄럽게만 생각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하고 몇 년 뒤 작은 오빠는 나에게 “너 교육대학이라도 가라!”했다. “나 마씀? 나 기초 실력 어성 못갑니다.” 승부욕이 강한 나였기에 내 대답은 단호했다.
 지금 같았으면 어찌어찌 대학 졸업장이라도 받았을 터인데. 그랬다면 내 인생 행로도 바뀌지 않았을까. 허나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그런 것도 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3 때였을까. 그때 학교 설립자인 고 ‘강 성익’ 이사장님의 강의를 들었던 게 문득 문득 생각이 난다. 그것이 지금도 내 생활에 보탬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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