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그분의 강의는 주로 여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셨다. 예를 들면 주방에서 상 차릴 때, 입안으로 들어가는 수저 부위를 손으로 덥석 잡으면 안 된다는 것 등등을. 그 일들이 지금도 잊혀 지질 않는다. 그 어른의 훤칠한 키와 중후한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분은 내 이모부의 형님이기도 했다. 서귀포에서 전분 공장을 맨 처음 시공한 분도 그분이셨다. 그 공장을 착공하기까지에는 내 아버지의 조언을 많이 필요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전분공장의 부지를 매입하려고 했을 때, 그 일대는 전부 논이었다. 자구리 바닷가로 가는 길가 옆(지금의 해군 아파트)의 넓은 토지를 당시 주인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을 아버지가 중재로 나서서 성사시켰다. 그 지주는 솔동산 입구에 사셨던 토박이(‘고○○’氏)로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 곳에 전분공장을 세우는 것을 별로 마뜩찮게 생각했던 그 지주는 어쩌면 부자들의 알력이었을까. 그 어른은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논을 팔지 않았을 걸세”라고 했다 한다.

 그 전분공장에는 우리도 얼마간의 주를 갖고 있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가 불귀의 객이 되자 우리에게도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전쟁 때문에 휴학했던 둘째 오빠가 복학하고 졸업반이었을 때다. 다른 대학들은 4년제였지만 의과대학은 6년이어서 마지막 등록금을 마려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고심 끝에 어머니는 오빠를 데리고 사장님을 만나러 가서 등록금 한 번 낼 것만 빌려 주십사고 부탁했다.

 그게 안 되면 우리도 전분공장에 주가 있으니 그 대신이라도 도와주실 수 없느냐고 사정했지만 일소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 오빠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처럼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고 어머니는 한참 후에 술회했다. 오빠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동분서주 했지만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소 장사하는 분에게 우리 밭을 사달라고 부탁 부탁해서 동문 로터리에 있는 몇 천 평의 밭을 아주 헐값에 팔아 그 등록금을 마련했다. 학교 설립자인 그분은 손꼽히는 재산가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서귀포에서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 집의 재산은 망치로 두들겨도 끄떡없다는 말까지 회자됐었다. 육영사업에 뜻을 둔 분으로 여겼는데, 학비 때문에 마음조리는 모자(母子)의 가슴을 왜 그렇게 아리게 했을까.
 그때 오빠는 서울의대생으로 소문난 수재였고 앞날이 창창했다는데…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1961년에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까지 지낸 그분도 가는 길은 막지 못했던지 그 어른이 돌아가신 뒤, 전분공장을 처분했다며 우리에게도 약간의 지분이 배분되었다. 예전 그토록 목이 타게 필요할 때 선심이라도 썼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학교에서 내가 들었던 그 분의 강의와는 동 떨어진 느낌이라 한때는 실망도 컸었다. 허나 다 지난일이기에 지금은 좋은 점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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