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추억>강은영 시민기자

모든 게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속에 남는 것은 추억뿐이다. 나이를 먹으면 자꾸 과거를 생각하듯 기억의 조각들을 한 톨 한 톨 들춰본다.

인생의 항해에 순풍만 있을까. 더러는 청승맞기 이를 데 없는 되새김질이이만, 기억 속에서 추억은 먼 옛날을 불러들인다.

고등학교 때 까지도 어머니는 나를 외지로 놓아 보낼 수가 없어 항상 옆에 끼고 살았다. 어릴 적부터 허약체질이던 나 역시 어머니를 떨어져서는 못살 것만 같았다.

남녀 공학이라도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겠지만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더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면 나는 하얀 광목천으로 만든 책가방을 허리 뒤에 감추고 다녔다.

혼자 터벅터벅 내려오다 먼 바다를 보노라면 봄날의 바다는 왜 그렇게 잔잔했던지. 온통 기름을 칠한 듯 반들거리는 바다는 수평선 끝까지 드넓은 호수였다. 내 마음은 그 위를 미끄러지듯 훨훨 날다가 포장되지 않은 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누가 볼 새라 얼른 일어나 뒤를 돌아보고는 혼자 멋쩍어 얼굴이 빨개졌다. 언니와 오빠들은 고등학교 대학교도 다들 외지로 나가서 공부를 했는데, 나만 왜 서귀포에서 남녀공학을 다녀야 하는지 늘 서운한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포목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아침 일찍 오일장에 나가버리면, 나는 학교에 가기 전 옆집의 넓은 공터(지금 안거리 밖거리 식당)에 멍석을 여남은 개씩 펴놓고 초여름에는 보리를, 가을이면 타작한 나락을 널어놓고 학교에 가곤 했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오기가 무섭게 책가방을 휙 던져놓고 다시 그것들을 거둬 드리는 일은 내가 도맡아 했다. 철따라 그렇게 하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일요일이 장날일 때는 나도 어머니 따라 중문 장에도 가고, 남원 장에도 따라 다녔다.

고교시절은 남녀공학이었지만 추억도 있고 낭만도 있었다. 지금은 멋있는 새연교가 생겼으나 예전에는 고래공장이 있었던 곳을 지나 썰물때 물이 다 빠지면 새섬으로 건너가서 놀다오기도 했다.

지금의 수협 공판장과 새연교 사이의 바다는(고깃배를 대는 곳) 언제나 호수처럼 잔잔했다. 여름날 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다. 남자 아이들과 작은 고깃배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나누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때도 여학생은 나 혼자였던 것 같다. 남자아이들과는 초 중학교 모두 동창이었으니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날 때면 그 때 일들이 얼핏 얼핏 떠올라 그리움이 머물곤 한다. 지나간 것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은 나이가 먹은 탓이리라.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가을이 왔다고 느낄 때쯤이면 저만치 떠나버리는 짧은 계절.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인연들도 우주의 질서에 의해 순환의 법칙이듯 보내고 아쉬워하는 것도 인생이 아니던가.

서푼어치의 감상에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도 현혹되지 않고 흔들림 없는 나이건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 삶도 그렇게 변방으로 떠밀려가듯 살아 온 세월이 이렁저렁 수 십 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해가 저물기 전 찬란한 황혼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희망과 설렘은 아직도 남아있으니 주책일까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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