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내가 그 아저씨를 발견한 건 우연한 산책길에서였다. 서귀포에 와서 처음 가 본 낯선 동네였지만 나는 뭔가에 이끌려 어떤 골목길로 들어섰다. 예쁘장한 집들 십여 채가 나란히 늘어선 길, 그 중에 유난히 꽃나무가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남의 집 앞이라 무심한 듯 지나쳤지만 되짚어 나오는 길에는 그 집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나뭇잎들에 반들반들 기름기가 흘렀고 넓지 않은 공간에 몇그루 나무인데도 상당히 풍성한 느낌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집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한 켠에 자동차가 세워진 마당에서 아저씨 한 분이 작업모를 눌러쓰고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고 계셨다. 역시 정원사의 손길이 있어서 였구나.

지나다가 나무들이 너무 이뻐서 잠시 보고 있습니다. 나는 행여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세라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고개를 드시는데, 8순 가까이 되어 보였다.

"그럼 들어와서 앞 마당도 구경해요"

정말요? 나는 잰 걸음으로 대문을 넘었다.

"와아!"

집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앞마당은 완전 새로운 세계였다. 섭섬, 문섬, 범섬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에, 바다를 향해 손짓하듯 가지 뻗은 소나무와 그 밑에 융단처럼 펼쳐진 고운 잔디밭, 제주의  검은 돌과 적절히 짝을 이룬 나무와 꽃들, 마당 양쪽에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의자들, 흔들의자에 앉아 하늘과 바다로 두 눈을 가득 채우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행복감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런 데서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

"여기 와서 그 의자에 앉으면 글이 술술 써져. 그림도 술술 그려지지"

언제 앞마당으로 오셨는지 아저씨가 잔디를 다듬는 일손을 멈추지 않은 채,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시는 게 아닌가.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좋은 책 쓰거들랑 나도 한 권 주고 "

나는 그제서야 아저씨가 집주인임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혹시 낼 아침에 그 집에 갔는데 집이 없어진 거 아냐? 집은 있는데 아저씨가, 누구시죠? 하면 어쩌지.

다음날, 대문은 열려 있었고 아저씨는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어서 와요"

 아저씨는 말을 하면서도 손은 쉬는 법이 없는 분 같았다. 아저씨의 하루는 아침 6시반, 집근처 오름에 오르는 걸로 시작된다고 했다.

"비오는 날도 가세요?"
"그럼! 우산 쓰고!"

'와! 대단하시다' 속으로 생각하는데 다음 말이 더 기막히다.

"그래야 남은 인생 살지"

아저씨가 식사하시는 모습은 남달랐다. 생선국을 드시는데 어찌나 몰입하시는지 음식을 만들 때는 정성스럽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먹는 모습에서 정성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식사 후 마당에 나가시더니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보셨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내 나이를 묻는 거야. 어떤 사람이 나한테 자기집이랑 바꾸재. 그게 이거보다 훨씬 넓지. 근데 내가 안 바꾼다고 그랬어. 내가 왜 바꿔? 그거 가꿀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데."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 호미를 드셨다.  손바닥 서너개 만한 자투리 땅에 애란을 심기 시작하셨다.

"이런 일을  좋아하시나봐요"
"잡념이 안 들어서 좋아. 하긴 사람의 머릿속에도 잡념이라는 잡초가 자라고 있지, 그걸 뽑아내고 그 자리에 예쁘고 좋은 것을 심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지."

아저씨가 일하시는 마당 옆에서 글을 쓰니 잠시도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다. 감시하거나 지켜보아서가 아니었다. 아저씨의 열심 에너지가 마당을 하나 가득 채우니 그 기운에 나도 덩달아 집중력이 높아진 것이었다. 여기 오면 글이 절로 써진다는 것은 풍광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인생을 살아내는 아저씨의 진지한 모습이 진정한 추동력이었다.

어린 시절,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저씨 얼굴에 슬쩍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얹혀졌다.  행복한 마음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인생은 묵묵히 부지런히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욕심보다는 책임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신 아저씨, 감사합니다.

금방 해가 졌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내가 모셔다 드리지"

마다 하는 데도 굳이 긴 팔 옷을 입고 나와 차에 시동을 켜셨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차에서 내리며 나는 굳이 아저씨라고 한번 불렀다. 무슨 띠시냐고 물었을 때 그걸 말하면 내 나이가 금방 나오잖아하시며 피하셨던 분이니 할아버지보다 아저씨라는 말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저씨는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물끄러미 보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오선생"
"네"
"좋은 글 쓰시오! "
"아, 네"

떠나가는 차를 안 보일 때까지 바라 보았다. 돌아서는 내 귀에 그 말씀이 다시 들렸다.

'좋은 글 쓰시오!'

그건 하늘의 명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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