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 정방폭포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느 여름날 어스름 저녁이었다. 제주시에서 S여고에 다니는 절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남자 친구 몇 명과 함께 구린새끼 골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져 집으로 왔다. 오자마자 작은 오빠는 내 뺨을 호되게 치는 것이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그때 내 친구는 남자동창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고 우리는 들러리로 간 것이 오빠에게 오해의 소지(所持)를 불러들였다. 별로 늦은 밤도 아니건만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뺨부터 때린 오빠가 너무 야속했다.

내게 아버지의 울타리는 없었지만 기라성 같은 오빠들이 셋이나 있어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네 오빠들이 무서워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고 어느 남자 동창의 말에 웃고 넘기긴 했지만, 대꼬챙이처럼 마르고 못생겨서 나에게는 남자들이 다가서지 않는 것으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고 보니, 그때 남녀공학에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는 생각 했었지만 그래도 철부지였던 그 시절이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다.

내 옆집에는 같은 반 애가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영이라는 그 애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삼남매를 데리고 와서 살았다. 그는 오빠와 여동생과 네 식구가 방 한 칸을 얻어서 살았다. 그 애 아버지는 새(鳥)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영이네 집에 고구마나 보리쌀 같은 것을 갖다 주라고 해서 여러 번 가져가곤 했다. 사라호 태풍 때는 팔월 추석날이라서 밥도 못해 먹었을 거라며, 차례를 지나고 난 후 식구들의 먹을 만큼의 음식들을 갖다 주곤 했다.

고2 땐지 고3 때인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때 전도 학생 음악 콩쿠르대회가 서귀포에서 있었다. 우리학교에는 음악 선생도 없었고 피아노도 없었으니 제대로 수업인들 받을 수 있었을까만, 적은 학생 수에서 그래도 내가 조금은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였을까.

그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옆집에 사는 친구 영이도 함께 참가했다. 장소는 서귀 읍민회관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가슴이 쿵쾅거려 심호흡을 해봤지만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합창은 했었으나, 생전 처음 혼자서 무대에 올라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더더욱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창을 부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온 몸이 떨렸다.

연습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채 무대에 섰으니 그럴 수밖에. 노래 곡목은 아 가을인가였다. 그런데 나는 아~ 소리도 못해보고 머뭇거리다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그때 일이 내 일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내 앞에 마이크만 갖다 대면 내 심장은 불규칙하게 뛴다. 그때 그렇게 노래를 해보지도 못하고 내려오는 바람에 내 친구는 이등 상을 받았다.

허나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은 그때 들었던 노래 중에 그 대회에는 제주농고에서 온 남학생 둘이 이중창을 했는데 냉면이라는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던지 나는 이중창이 그렇게 듣기 좋은 줄은 몰랐다. 그네들이 대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헌데 그날 우연인지 늦은 시간에 솔동산 우리 집 동네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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