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간판에 24시간 영업이라고 써 놓은 업소들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살던 김포 시골동네의 이웃집 할머니이다.

그 분은 동네에 노는 땅에는 뭐라도 심는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그 집의 텃밭은 채소 박물관이었고 담장은 아이비 대신 호박잎으로 덮혔으며 가을이면 탐스런 호박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마음을 조리게 하곤 했다.

어느날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면 사람은 없고 신문지에 싼 호박 한덩이, 할머니가 놓고 가신 것이다. 동네에서 난 것은 동네사람들의 몫도 있으니 나눠야한다며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도 마다하셨다.

어느날 할머니는 면사무소에 가셔서 대판 호통을 치셨다. 할머니댁 앞에 달아놓은 외등을 당장 떼라는 요구셨다. 할머니댁은 다섯 집이 사는 골목의 첫 집이었는데 서울서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밤에 너무 으슥하다며 면사무소에 민원을 넣은 결과 달리게 된 외등이었다.

아니, 남의 집 농사 망칠 일 있어? 밤에 그렇게 환하게 불을 켜놓으면 호박이 어떻게 영글어? 할머니, 그래도 밤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섭다는데 어쩝니까? 이해를 하셔야죠

그러나 면사무소 직원은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봐, 사람이고 호박이고 밤에는 자야 되는 거야. 그러라고 해가 지는 거야, 밤늦게 돌아다니질 말아야지, 안 그래?

제주에 와서 그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을 두 명 만났다. 한 분은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직접 잡은 생선으로 찌개를 끓여 파는 아저씨이다. 강연을 갔다가 명물집이 있다기에 따라나섰는데 나를 데려간 사람은 점심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인 11시 반인데도 서둘러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가보니 벌써 의자가 다 차서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여러 명이나 있었다. 내 입에는 그냥 그런 맛이었는데 왜 이 집에 사람이 모이는 걸까? 이 집은 딱 점심손님만 받고 문을 닫는 시한부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주인아저씨가 맛이 어떠냐고 묻기에 나도 물었다. 왜 이렇게 식당을 일찍 닫으세요? 그 분이 답했다. 나도 놀면서 좀 재밌게 살아야 하지 않겠오?, 그래도 낮에는 시간이 없고 저녁에 먹고 싶어 오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집에 가서 먹으면 돼요. 그래야 다른 음식점도 먹고 살지, 안 그렇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존경심이 일었다.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경영으로 빵은 물론이고 순대에까지 손을 뻗치고 대형 유통업체들이 모든 손님을 빨대처럼 빨아들여 동네의 오래된 생계형 가게들을 위협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 얼마나 훌륭한 공동체적 의식인가.

다른 한 명은 여자였다. 앞의 분과 유사하게 점심때만 음식점을 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분은 한술 더 떠서 그날 준비한 식재료가 떨어지면 시간에 상관없이 영업종료였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오는데도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했다.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둘러 오게 하는 영업전략 일까?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오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매우 친절했다. 밥상을 낸 다음에는 홀을 돌면서 떨어진 반찬을 알아서 더 갖다 주었다. 홀 써빙을 하는 중에나 음식을 만드는 중에는 다 먹은 사람이 계산대에 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일을 우선으로 했다.

돈 안내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저러나? 안 내고 가도 어쩌겠어요? 내 집을 찾아와서 밥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우선이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돈 안 주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집에 오는 사람은 다 착해요 그는 자신이 손님을 귀하게 여기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그 숫자만큼 재료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치는 그 정성과 배려에 음식맛도 좋고 기분도 좋아지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집을 다시 찾고 아쉬움을 맛보지 않기 위해 서둘러 오는 것일 게다. 겉으로 보면 마켓팅 전략 같지만 밑바닥에는 욕심이라는 자기와의 싸움, 돈이 최고라는 요즘 세태와의 싸움에서 이긴 내공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유명음식점으로 부자가 된 집의 딸이 있다. 그 애는 자기의 성장기 시절은 지겹게 식당일 도운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은 지금 몸이 아파 고통 속에 살고 계시니 돈부자가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짓는다.

돈을 벌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는 세상, 돈을 좇아 눈에 불을 켜는 사람들 , 그리고 그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람들 눈에 이들은 바보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돈을 덜 벌더라도  자기의 시간을 가지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게 진짜 부자, 진정한 인생 성공이 아닐까?  욕심을 이기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삶을 조용히 실천하고 사는 이 분들은 지혜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가끔씩 지금껏 돈도 많이 모으지 못하고 뭐하고 살았나 살짝 우울해질 때면 이들을 떠올린다. 이들처럼 평범한 모습의 현자(賢者)들이 세상에는 아직 많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내 삶에 용기를 준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