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예전에 나는 성당을 다녔다. 내 언니 동창이며 친구인 S씨가 성가대에서 피아노를 치며 성가연습을 시키고 있을 때 나도 성가대로 활동을 했다. 그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수녀가 될 것이라 했었는데 한참 후에 결혼을 했고,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아들에게 전수했는지 아드님이 신부(神父)가 되었다.

성당에 다닐 때는 나도 교리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영세는 받지 않았다. 당시 성가대들은 성탄절 새벽이면 교우들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성가를 부르고 기원도 드리곤 했다.

해마다 여름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날이면, 성가대들은 중문 해수욕장에 가서 뜨거운 햇살아래서 모래를 지치기도 하고, 파도타기를 하면서 신나게 하루를 즐기기도 했다.

이슬비 내리던 어느 가을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성가연습을 가는 중이었는데, 어떤 낯모르는 남자가 길을 묻기에 대강 가르쳐 드리고는 곧장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가연습을 끝내고 나왔더니 먼발치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그쳐있었고 사위는 어둠에 묻혀 호젓함마저 감돌았다.

제주시에서 왔다는 그분은 나보다 한참 위였고 같은 종씨(宗氏)였다. 훤칠한 키는 아니었지만 선하게 생긴 눈빛이 믿음을 주는 분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는 딱히 갈만한 장소가 없어 방파제로 걸음을 옮겼다.

갯내음 물씬 풍기며 가만가만 뒤척이는 밤바다는 유순했다. 밀려왔다가 휘돌아 나가며 이어지는 해조음. 어둠이 깃든 그 바닷가에서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래를 불러주며 그분은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싶다했다.

우리는 그것이 전부였다. 세월이가면이라는 박인환의 시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시구가 있다. 인연 쌓기도 삶의 한 과정이거늘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간, 내게 추억을 남겼던 이들의 이름은, 하찮은 기억 속의 조각들이라 해도 잊혀 지질 않는다. 때로는 지나간 일들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면서…

그 당시 성가대에는 윤구선이라는 고등학교 일 년 후배가 있었다. 천성이 여자인 그는 얌전하고 예뻤으며 나를 무척 따랐다.

우리는 선후배 관계였지만 나는 동생이 없었고, 그는 언니가 없어서 나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그 애도 아는 선배는 나뿐이었고 성가대에서 같이 활동을 해서인지 더 친했던 것 같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아이와 가깝게 지내던 두 명이 친구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얼마나 섭섭했는지 내 몸에서 일부가 빠져나가 버린 듯 너무 허전했다. 나를 참 많이 따랐는데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가버릴 줄은 전혀 뜻밖이었다.

어른들의 이념의 차이로 가깝게 지냈던 사이도 소식을 모르고 지내게 되어 버렸으니. 그는 아무 예고도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다시 북송선을 탔다는 말만 한참 후에 풍문으로 들었다.

그 후 다시 얼핏 들은 이야기는 일본으로 간 후 그녀는 의사가 되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북에서 살아있기는 할까. 아주 오래 전 내 소꿉친구도 그렇게 일본을 거쳐 북으로 갔는데…

지금 나는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옛 시절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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