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가 된 어머니를 서귀포로 이사오시게 한 이유는 그림이었다. 74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머니 속에 잠재해있던 그림재능이 드러난 후 어머니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식들과 손자손녀들 뒤치다꺼리로 일관된 삶에서 당신 자신만의 시간과 당신 자신과 대화기회를 갖게 되신 것이다. 나로서는 명색이 여성학자면서 어머니를 식민지로 삼아 살고 있다는 양심의 가잭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다.

 팔순잔치를 그림전으로 열고, 해마다 크고 작은 전시를 하면서 어머니의 인생에서 그림은 소울메이트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84세가 되면서 어머니의 그림은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어머니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자폐성장애를 가진 딸애를 데리고 내가 이런 저런 새로운 모색을 하는 사이 큰언니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와  전화를 하면서 요새 무슨 그림을 그리셨냐고 물으면 어머니의 답은 시큰둥했다.

 “도무지 그림이 되질 않는다. 손이 굳었는지, 내 맘에 들게가 안 된다. 재미가 없어서 안 그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손이 굳으신 게 아니라 환경이 불안정한 탓이고 재미가 없다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삶에 낙이 없으시다는 뜻이 아닌가. 

 서귀포의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크지 않은 도시, 그리고 조급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서서히 내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나는 이곳이야말로 어머니가 다시 그림과 연애를 하시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엄마, 서귀포는 겨울에도 날씨가 포근해서 봄날이래. 풍경좋지, 공기맑지, 오죽하면 여기서 노후를 보내는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하겠어요? 서귀포로 오세요.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풍경들을 어머니는 그릴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

 “그래, 서귀포가 따뜻하더라. 사람들도 순하고, 바다를 보니 시야가 탁 트여서 속이 시원하더라”
 어머니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절반은 성공이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19살 어린 나이에 전쟁을 만나 배를 타고 고향 황해도 해주를 떠나 섬에서 피난생활을 하셨고 결국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어머니에게 바다와 섬은 낭만이 아니라 공포와 슬픔이었다. 나는 바짝 어머니를 졸랐다.

 “엄마, 여긴 화가들이 많아, 미술관도 많고, 이중섭 거리에는 이중섭의 예술혼이 살아 있을테니 그 길을 왔다갔다 하다보면 그림이 저절로 그려질지도 모르잖아요?”

 “내 그림을 이중섭이 그려주냐?”

 헉! 과연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그림혼은 짱짱하게 건재하고 있었다. 이 혼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서귀포로 모셔와야한다. 서둘러 이리저리 공작을 펴서 어머니의 입에서 ‘좋두룩 해보자”는 답을 얻어 낸 후 한 달만에 어머니는 서귀포주민이 되셨다.

 날마다 한라산을 보고, 저녁마다 제주 막걸리 한 잔에 취하고, 남들은 휴가내서 보러오는 바다를 식후 산책으로 다니고,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면서 한 달이 갔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덤덤했다. 한창 그림에 물이 오르셨을 때 보이던 ‘흰머리 소녀’의 감성은 도통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바로 어제였다. 눈발이 날리던 오후 4시 왈종미술관, 어머니는 열 살이 안 된 아이들 열명 속에 섞여 앉아 그림을 그리셨다. 미술관 구경을 갔다가 마침 어린이 미술교실(이왈종화백의 재능기부로 15년째 해 오고 있음)을 만난 것이다.

 어머니는 스케치북에 펜으로 말을 그리셨다. 처음에는 ‘애들 그리는 거 구경이나 하지’하시더니 어찌나 몰입해서 그리시는지, 아이들이 다가왔다. ‘와, 말이다’, ‘잘 그렸다’ 꼬마 화가들의 품평에 ‘그러냐? 고마워, 늬들도 잘 그렸어’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말씀을 하시는데 어머니의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어났다. 저거야, 저거, 내가 어머니에게 찾아드리고 싶었던 게 바로 저거야. 아무리 멋진 풍경, 맛난 음식 앞에서도 피지 않던 마음의 꽃이 어린 화가들과의 교류에서 한 순간 활짝 피어난 것이다. 시들어 있던 어머니의 영혼에 생기가 나타난 것이다.

 눈물을 감추려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돌아보니 어머니가 안 보였다. 이왈종화백에게 그림사인을 받으려는 아이들 속에 같이 서 계신 키 작은 어머니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미술 교실을 마치고 나오는데 눈발이 여전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시는데 내 발이 저렸다.

 “날씨가 웬일이지? 서귀포에 이런 날씨가 없는데、이상하네..”
“서귀포라고 왜 겨울이 없겠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는데 내가 말띠라서 서귀포에 왔나보다“

 이제, 이곳을 당신의 인연처로 받아들이시는 어머니, 이중섭의 미술의 혼이 오늘 꼬마화가들을 통해 우리 어머니와 만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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