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명/동화작가

모두 다 탔다고. 기록까지도.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럼 아기들의 기록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영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한 숨이 뱉어졌다.
이것이구나. 이것이었구나.
그렇게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무엇인가가 걷어지는 것 같았다. 턱까지 올라온 숨이 쉬어지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아니 뭔가 해낸 듯 한 이상야릇한 마음까지도 들었다.
내 속에 이런 악마 같은 존재가 살았었구나. 악마…….
그런 생각을 하던 나영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의 이기심이 갖는 평온함이라니…….
기절할 것만 같다.
아~, 하느님, 정말 제가 이처럼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까!
나영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가짜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애초에 한 번도 진실했던 적이 없는 자신처럼 생각된다.
이제 아무도 용서 해 주지 않겠지. 아무도…….
나영은 두려웠다. 그렇다고 이미 저지른 일을 되돌린다는 건 더욱 두렵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곁에서 즐거운 웃음을 웃는 시어머니와 얼굴 가득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는 남편의 모습, 저 사람이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참으로 생경스럽기 그지없다. 저 얼굴이 나영과 13년을 함께 산 사람의 얼굴인지 낯설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영은 그런 남편과 시어머니의 모습 속에 제 모습을 발견하며 몸을 떤다.
이번에도 딸이면 아범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했지!
웃느라 온 얼굴을 찡그리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시어머니. 손자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여자. 3대 독자인 남편. 그에게 아들을 남겨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아대던 그녀가 웃고 있다. 집안의 대가 끊긴다고 나영만 보면 눈 꼬리를 치뜨고 역정을 내던 시어머니그녀가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할 거야. 아무도 모르게…….
나영은 고개를 흔든다. 절대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 한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10분후에 아기 면회시간입니다.
간호사는 나영의 혈압과 체온을 측정하면서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아이고, 고마워요.
시어머니는 얼른 나영을 일으켜 세우며 같이 가자고 한다. 나영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추스리며 한발자국한발자국 걸음을 뗀다. 신생아실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방망이질로 요란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영은 더 이상 걸음을 떼지 못한다.
에미야, 아범하고 우리만 다녀오마. 에미 넌 좀 더 누워 있어야겠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도 아가가 보고 싶어요. 저도 갈래요.
나영이 다리에 힘을 주고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당긴다.
그래, 그래, 너도 가자. 얼마나 기다린 아들인데……, 우리보다 네가 더 했겠지. 아범아 에   미 좀 부축해라.
나영은 휠체어에 올라앉는다.
신생아실이라고 적힌 글자 옆 통로를 지나자, 커다란 유리로 한 쪽 벽을 온통 만든 곳이었다. 벌써, 몇 명의 산모들이 유리문을 통해 아기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초록색 모자를 쓴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유리벽 쪽으로 걸어온다.
이나영 아기
아기는 김진숙 아기가 아닌 이나영의 이름으로 파란 팔찌를 차고 있었다. 가슴에서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아이고, 우리 대감 잘 생겼다.
두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정말 나영이 낳은 자신의 아기라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한 번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고 싶다는 강한 모성도 일어났다.
내가 미쳤나봐. 미쳤지, 미쳤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나영을 향해 간호사가 유리벽 너머에서 손짓을 한다. 입을 벙긋벙긋 하며, 이리로 들어오라고 나영을 부른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시어머니와 남편도 따라나선다.
산모만 들어오세요.
시어머니와 남편은 아쉬움 가득한 낯빛으로 나영을 건네다 본다. 둘을 잠시라도 따돌릴 수 있어서 나영은 일순간 기분이 좋다.

너무 잘생겼어요.
간호사는 아기를 건네준다.
아기는 꼭 감은 두 눈을 억지로 뜬다. 아가의 초점 없는 눈이 짧게 나영과 마주친다. 나영은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자기의 아가를 안은 어미의 마음일 뿐이다. 나영은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댄다. 아기는 손가락 쪽으로 그 작은 입을 방긋방긋 벌린다.
아~!
나영은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난생처음 아기를 낳아 본 것처럼 가슴이 떨리는 환희를 맛보았다.
이삼일 지나면 젖이 돌 거예요. 그때 모유 먹이세요.
간호사의 친절한 말에 나영은 정신을 찾았다. 아기를 간호사에게 건네주며 신생아실을 나왔다.
아가야!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나영은 그렇게 잊고 있었다.
지아에 대해서도, 진숙에 대해서도…….
그런데 지아을 만나고 나서부터 자꾸만 9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이 나영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마, 요즘 왜 그래요?
뭘?
민호가 넋 놓고 있는 나영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 요즘 어디가 아픈 것 같아요. 밥도 잘 안 먹고.
민호는 정말 엄마가 걱정인가보다. 또래 아이들 보다 키도 크고, 생각도 깊은 민호는 엄마나영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나영은 민호의 손이 이마에 닿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머리가 뜨거워요!
민호는 나영의 이마에 다시 손을 갖다 대며, 손이 데인 아이처럼 입을 오므리고 호호 불며 너스레를 떤다. 나영은 그런 민호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미어져 나가는 것 같다.
아, 내 아들……. 어쩌면 좋아, 어쩌면…….
나영은 민호를 당겨서 가슴에 안는다. 눈물이 끝없이 쏟아진다.
엄마, 그만 울어요. 많이 울면 머리 아파요.
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키우는 사람을 닮는다고 했던가? 민호는 나영도 닮았고, 죽은 남편도 닮아있었다.
민호를 보던 나영의 눈에 지아가 비친다. 유난히 반듯한 지아의 이마, 금방이라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처럼 말간눈물이 고이던 커다란 눈을 가진 지아가 생각났다.
지아야, 미안하다. 지아야.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던 나영은 어릴 때 친정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마가 이렇게 반듯해야지, 여자는 잘 살지.
동그스름하고 뽀얀 이마.
그래, 우리 지아도 잘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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