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한의원은 대문부터 완전 전설의 고향이었다. 살짝 옆으로 기운듯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자그마한 대문은 반세기 가까운 시간의 흐름을 완전 등지고 있었다. 제주하고도 칠성통 번화가에서 이추룩 옛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니....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작은 마당을 지났다. 어릴 적 우리 동네 구멍가게문과 똑같은 유리 달린 미닫이 나무틀문, 그문을 밀고 들어가니 툇마루가 나타났다.

한 자높이에 폭 또한 한 자 정도 됨직한 손바닥만한 조각마루는 옹색하기조차 했다. 그걸 딛고 올라서니 네 평이나 될까. 여염집 안방보다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오른편에 나무책상이 있고 왼편에는 벽을 따라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진료실과 대기실이 어떤 차단없이 그대로 한통속인 공간에는 진료에 필요한 것과 대기에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텅 비면 고요하다더니 그 정갈함을 바탕으로 방안에는 차분한 엄숙함이 충만했다.

나무책상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 한의사와 마주 앉았다. 맥을 짚기 전에 진료카드를 작성하는 시간, 그런데 이건? 영락없이 어릴 적 버스 차장이 끊어주던 누런 종이버스표가 아닌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전화번호는 어떻게 됩니까? 숙달된 질문, 노인의 목소리는 방안의 아침 공기처럼 맑았다. 교통카드보다 작은 갱지에 볼펜으로 펼쳐지는 필체는 단정했다. 어머니의 맥을 짚고 있는 동안은 깊은 정적 그 자체였다.

"혹시 어지럽지 않습니까?"
"아뇨, 모르겠는데요."
"귀에서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네, 가끔요."
"이러면 치매가 올 수 있습니다"

아이쿠, 가슴이 철렁했다. 노인들은 한 해 한 해가 다르다더니 해가 바뀌자 마자 급격히 기력이 딸리시는 듯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새벽길을 나섰던 것인데 과연 위기였구나. 그러나 할아버지 한의사는 더 이상 말씀이 없었다.

"저, 어머니가 고혈압과 당뇨도 좀 있으신데...."

"그건 넣었습니다"  아니, 벌써? 이런저런 증세 나열은 아무 의미가 없을 듯 했다. "약은 오후 3시에 나옵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집에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니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거긴 태초의 고요함이 있었다. 고요해서 편안한, 어머니의 자궁 같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한의사는 삼신할미?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인상이 이지적이면서도 부드러워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더 느껴졌다.

약은 매우 썼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이롭고 양약은 입에 쓰나 몸에 유익하다는 말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쓰디썼다. 약은 써야하는 법이라 믿고 사셨던 어머니에게는 딱이었다.

"얘, 나는 이 약을 먹을 때마다 그 한의사 양반 얼굴이 떠오른다. 이상하지."

어머니도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건 한마디로 신뢰감이었다. 개원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반 세기를 지켜온 그 분의 성품에서 '한결같음'을 느끼신 것이었다.

'눈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어머니 말씀에 열흘치 약이 떨어질 무렵  다시 약을 지으러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건강관계로 문을 닫습니다. 나이 때문이니 양해바랍니다. 그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간단명료한 겸손함이 그 분의 말씀이 틀림없었다. 자물쇠가 장신구처럼 달린 대문 앞에서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동이 트지 않은 그 이른 아침, 저 대문을 넘어 들어가서 보았던 모든 것과 할아버지 한의사가 정말 실존했던 것일까?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닐까? 강렬한 첫인상과 급작스런 이별 앞에 나는 잠시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아쉬웠다. 약은 둘째치고 그 고요한 공간과 소나무처럼 독야청청한 할아버지 한의사의 풍모를 다시는 체험할 수 없게 된 것이 눈물 핑 돌게 아쉬웠다. 그날 어머니를 모시고 나올 때, 진료책상에서 문가까지 걸어나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시던 그 모습이 전설의 고향 라스트 씬이런가.

골목을 나오다 다시 뒤돌아보았다. 푸른빛 나무대문이 기와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갓을 쓰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할아버지, 그간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긴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문이 되었을 이 공간이 부디 칠성통의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아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할아버지 한의사께서는 부질없다 탓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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