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원로교육자·수필가

길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이 많다. 신작로가 응당 우리 강정마을을 거쳐 갈만한 곳인데도 우회로 오지마을이 돼 버렸다.

선인들은 고작 우마가 다닐 수 있으면 족했다. 대로를 낸다는 것은 귀한 땅의 소모성으로만 여긴 것이다.

일본 관헌들이 드나들면 의논 족족히 살아가는 이웃 정서가 구겨지고, 더욱이 버젓이 내 논 가양주(家釀酒) 단지 통 숨겨야 하고 돼지추렴하다 걸리면 먹은 성 다 내리는 등 수모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진정서로 저지했다고 어른들은 거침없이 말해왔다.

큰길로 나가는데 허비한 그간의 고통을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단지 원망 뿐이었다. 일제침략으로 목숨을 끊었던 한 선비의 말 그대로 "만약 조선의 길이 넓고 다리가 단단했던들 우리 역사는 외침에 더욱 혹심하게 유린당했을 것"이라는 논리로 그 좁고 험한 길에 만족했었다.

골목길에도 엄연한 예의 범절과 질서가 있었다. 새벽에 허벅지고 나서지 않았다. 대사에 나서는 장부와 마주치면 소리 없는 눈빛 대화로 주춤했다. 또한 학동(學童)이 가는 길을 가로지르면 절망해진다며 잠시 멈추는 지지(知止)의 지혜를 보여줬다. 관덕정 근처에서 한잔하고 나면 기고만장해 남문통 거리를 갈짖자로 헤매도 누가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길이었다.

길이 좁은 곳에서는 한걸음에 비켜서서 상대가 지니가게 하던 논두렁 인정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오솔길은 찻길이 돼 동서에서 원하지 않은 것들도 그 길을 통해 거침없이 들어오고 있다.

골목길이라도 옛 정취를 이어갈 줄 믿었는데 번지없는 주차장이 돼버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올레만은 살아있어 다행이다.

옛 신작로는 고속도로로 변모해 아기자기한 제주의 옛 전원풍경은 소멸되고 신호등만 깜박거리고 있다. 광난 금수마냥 씽씽 달리는 자동차에 놀라 이웃사촌 집도 멀어졌다.

선인들이 100년 앞을 내다본 혜안이 있었는지 그 덕에 전원마을의 운치가 살아있어 다행이다. 쌓였던 원분이 이제야 풀린다.

자동차가 처음 발명됐을 때도 빨리 달리면 벌금을 무는 적기법(赤旗法)이 있었다고 하나 가속페달을 점점 세게 밟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1970년대 한 때 들썩거린 것은 교통안전 교육이었다. 교육으로 대처하려는 외침에 너도 나도 황색기를 들고 교문 앞에 나서 노소가 함께 체험했다.

활개치며 걷던 우리의 길은 문명의 이기에 빼앗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옹졸하게 걷는 것이 너무나 애처롭다.

곧게 뻗은 도로는 문명이 낳은 자동차 길이고 인생의 길은 곡선이다.

끝이 한눈에 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날까? 꼬불꼬불 돌아가는 데 인생의 묘미가 있지 않은가?

흙 길로 남아 있는 고향. 뒷산의 오솔길을 걸어보자. 보들보들한 옛 정리(情理)가 아직도 살아 있다.

사서오경에 통달하지 않아도 핸드을 잡는 순간 인생의 정도(正道)가 보인다. 인생독본이 따로 없다. 무인카메라에는 정황을 곧이곧대로 찍힌다.

'민심이 천심'인 무인카메라도 그렇다. 민의에 역주행하여 위기를 자초한 사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면 사람들은 불법으로 유턴하고 작은 골목길로 빠져든다.

남들보다 먼저 성공하는 법만 배웠는지 요리조리 차선을 바꿔가며 출세가도를 질주하려 한다. 속도와 만족감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먼 훗날을 보라. 벌점이 많으면 단명해 질 수밖에 없다. 이제 부모의 운전석에서 배우고 익힌 양보의 미덕과 준법의식이 먼 훗날 자녀들의 인생 핸들을 잡는데 교훈이 될 날도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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