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나는 한라산을 볼 때마다 뭐 저런 놈의 산이 있나
구름에 덮혀 있으면 덮힌대로 이뿌고
벗어지면 벗어진대로 이뿌고
세상에서 제일 이뿐 산이 저거라
처음에는 몰랐는데
서울살다 내려와 보니
정말 멋진거라"

영자씨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니 저절로 시가 된다. 올해 85세의 나이에 소녀의 감수성을 여전히 간직한 그 분을 나는 도저히 할머니라고 부를 마음이 들지 않아 감히 이름을 따라 영자씨라고 부르는 무례를 범하기로 했다.

올해 86세 되신 우리 어머니도 낯설은 땅 서귀포에 이사와 사시면서 마음의 의지처로 삼고 계신 것이 한라산이다. 최근에 가벼운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셨음에도 하루에 한 번은 꼭 한라산을 보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신다. 날이 맑아 또렷하게 보인 날은 님이라도 만난 듯이 기뻐하신다. 올해 92세 되신 나의 은사님도 2년전에 진해에서 이곳 제주로 이사 오셨다. 아파트 5층에 사시면서 거실에 앉아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을 일상의 낙으로 삼고 계신다. 이쯤 되면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의 대표소설 <노인과 바다>에 견줄 <노파와 한라산>이 나올 만한다.

"내가 환갑나이에 서귀포를 떠났다가 4년전에 돌아왔어. 젊어서도 한라산 봤지만 그때는 그냥 있구나만 생각했지 아름답고 매력있는 줄은 몰랐다. 큰 산 하나 있구나 정도였지. 그런데 지금은 젤로 아까운 게 한라산이다. 눈이 와 있어도, 화창해도, 비가 올라고 하면 한라산이 쑥 하니 내 앞으로 들어와 가깝게 느껴져, 그게 매력이라, 저산은. 매일 시장에서 집으로  걸어올라가면서 '아, 저 한라산, 죽으면 못 볼 한라산' 하면서 본다게"

금강산도 두 번이나 가봤고  속리산, 북한산, 웬만한 산을 다 가봤지만 한라산 닮은 산은 없었다. 일본도 가봤지만 한라산만한 산은 없었다. 다른 산들을 보면 볼수록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더 커졌다. 그렇게 아름다운 한라산을 보시면서 영자씨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내가 이런 좋은 데서 태어났구나 생각하지"

바다는 어때요? "바다도 아름답지. 답답하면 바다를 쳐다보면 마음이 호끔 풀린다. 내가 사는 정방동에서 나가면 금방 바다 아니냐. 바다가 검으면 파도가 쎄구, 하얗게 보이면 파도가 안 쎄고...." 흐려지는 말끝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을까. '인생도 바다처럼 거친 날이 있다가 잔잔한 날도 있는 그런 거란다' 바닷속 영등할망의 위로를 듣는 것일까.

영자씨는 직장생활을 하는 딸의 고달픔을 덜어주기 위해 환갑넘은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 살림과 손자 둘을 키우느라 20년 세월이 흘렀다. 서귀포에 돌아오니 뭐가 젤 좋으실까. 한라산 뿐은 분명 아닐터.

"고향에 오니 안정감있고 복잡한 도시생활보다 차분하고 공기좋고 사람들 순박하고 육지보다 좋은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

우리의 영자씨, 갑자기 눈이 반짝하시며 올레길 21코스처럼 서귀포자랑이 한없이 이어진다.

"따순 데라서 밥은 안굶지. 요때 나가면 요풀, 저때 가면 저풀, 몸만 성하면 고사리도 꺾고 달래도 캐고 들에 나가면 맨 돈 안 줘도 먹을 거, 들에서 반찬이 나오니까 소금만 있으면 되는 거라, 간만 맞추면 되니까"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소금만 있으면 된다는 이 유머감각이라니. 영자씨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운율은 말맛을 내는 천연소금이다.

"서귀포 사람들이 말은 투박해도 정은 많다게. 내가 경상도, 전라도 다 살아봤지만 그 동네에 과일이 아무리 많이 나도 길가에다 내놓고 그냥 먹고 가라는 사람은 없더라. 제주도는 밀감 바구니에 내놓고 먹고 가라 먹고 가라 한다. 서귀포같이 좋은 데가 어딨냐?  전국에 여기만큼 존데가 없다게"

듣고 보니 그렇다. 어디 가나 감귤 권하는 세상이 서귀포다. 풍부해서만이 아니라 인심이 좋아서였구나. 85세 나이에도 영자씨는 매일 정시출근 정시퇴근하는 '직장인'이다. 일하는 게 좋으세요?

"여긴 원래 할망 돼도 놀라구 안해, 일이 습관이 돼서, 일을 해야 먹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촌할망들은 무겁게 짊어지고 팔러온다. 안 해도 되는데 자식들이 돈 보내준 거 꼬작꼬작 모아놓고 그게 습관이야. 어려운 시절을 살아서 안 그러냐. 논이 없으니까 쌀 한줌을 보면 곤밥(쌀밥), 곤떡(쌀떡) 귀하던 때 생각나고... 오메기 떡은 차좁쌀을 방애(방아)로 쪄서 거칠게 오물오물해서 만들어 오메기 떡이다."

영자씨도 젊어서는 어머니와 할머니세대의 생활방식에 웃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을 하니까 건강장수하는 거라, 조냥해(절약해) 살라는 것도 꼭 맞는 말이구, 며느리 보면 안거리 내주고 밖거리에서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더 맞는 거야. 그 어른들은 자유가 좋다는 걸 안거라. 되게 현명하지 않으냐?"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 했던가. 설문대할망과 영등할망 품으로 돌아온 영자씨, 그 품이 그녀를 다시 소녀로 돌려놓은 것이리라. 

"난 서귀포에 태어난 거 맘에 든다."

영자씨의 천진한 웃음과 말투에 어리광이 배어난다. 그럴 수밖에, 두 할망 앞에선 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애기'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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