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원로교육자

이 가파도에 얽힌 옛 이야기는 1960년 7월, 미국 피파디 교육재단 후원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학술조사단이 왔을 때 가파도에서 낳아, 여태까지 묻에 나와보지 못한 고령 노인 몇 분을 선정해 자연스레 대화하는 것을 녹음해 제주방언연구자료로 삼겠다는 취지에서 서울대학 이기문 주임교수의 제의를 남제주교육감이 수락해 당시 서귀포 초등학교 평교사인 필자가 동행해 통역사(?) 역할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 들이다.

평범함 이야기이면서도 내면에는 숨어있는 섬사람들이 진솔한 삶과 애환이 담겨있다. 부산대 교수 두 분은 해양실태조사를 실시했다.

1.궁하면 통하는 삶의 지혜(궁즉통)

옛날부터 가파도에는 앞 바다를 항해하던 외국 상선들이 조난사고가 수시로 발행해 서양사람들이 섬 남쪽 해안에 표류돼와 이 사람들을 대정고을에 있는 현청에 압송하는데 여간 애를 먹였다고 한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마치 가난한 집에 식개(밤 제사) 돌아오듯이 생기니 큰 골칫거리였다.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친 아침 새벽에 앞 바다 개맛디(포구)에 가보니 서양 사람이 보들보들 떨고 있는 참상을 보고는 너무나 가엾어 즉시 대정 고을로 이송하게 됐다. 지금과 같이 마을 방송시설도 없는 때라 구두전갈로 마을 출역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남쪽 개맛디에서 상동 마제포까지는 한 참 가량 되는 길이라 그 등치 크고 기진맥진해 스러진 사람을 마제포까지 옮겨가는데 등에 업고 갈 수밖에 별 방책이 없었다.

몸체가 큰데다 죽일까봐 공포에 떨어 쫙 느려지는 통에 뽐내던 건장한 장사도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모두 내려놔 숨돌려가며 교대로 업어 가는데 때마침 체구가 작아 별 볼일 없는 어른차례가 돌아왔다.

다들 저 약골이랑 집구석이나 지키지 뭐하러 왔는가 비아냥거리면서 빈소(嚬笑)가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업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약골 어른이 업으니 질질 끌던 발도 올리고 등에 군벗(갯바위에 붙어사는 작은 조개류)같이 바짝 붙어 한가하게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하도 물어와 오랫동안 그 비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려 주었다. 공포에 떠는 서양사람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기 위해 업은 손가락으로 불알 밑을 살금살금 쓸어주니 "아 이제 살려주는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어 그제서야 체구 중력이 한 대 모아지면서 수월해지더라는 고백이었다.

이때부터 가파도에는 한 어른의 슬기로운 지혜로 낸 비법이 오랫동안 통용돼 왔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지혜가 아닌가. 요즘 세상 늙은이 저래가라 하지 맙시다. 지식과 지혜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젊은이들은 지식은 풍부하지만 노세대들은 살아온 경험에서 얻은 높은 경륜과 지혜가 겸비돼있는 것이다.

2.보리쌀 한 되 더 먹으면 갈 것을 조급히 서둘렀다고 바다 건너가겠는가. (섬사람들이 이구동성)

이 말을 듣게 된 동기는 이렇다. 1박2일 일정을 잡고 섬에 들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은 마을 이장 댁을 방문해 하술조사 취지를 말씀드려 협조요형을 구했더니 미력이나마 도와드리겠다는 말씀 한 마디에 섬사람들이 후한 정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민박시설이 없으니 잠자리는 학교 교무실로 하되 식수 없는 소박한 식상이 될 것이라며 양해를 구해왔다. 당시 제주도 성안에서 내노라 하는 집에서도 흰쌀밥(제주말로는 일명 곤밥)으로 세기를 먹는 집안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반 지기 밥이라 해서 흰쌀 3, 잡곡 7비율로 혼합해 지은 밥을 먹는 집은 상위 급이라 했다. 태반이 보리밥 아니면 조팝이 주식이었다. 요즘 말하는 건강식을 제주 선인들은 먹어 온 셈이다.

당시 가파도는 향약에 근거해 금주지역으로 지정돼 주류반입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민들과의 대화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조촐한 한잔 술이라도 나누면서 대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주임교수의 제안에 위반인줄 알면서도 일단 위스키 몇 병과 건빵, 마른 오징어를 가져갔다. 요즘 같으면 라면 통조림 등 비상식품이 많은데 당시는 국산 위스키가 양주 몫을 독점할 정도로 애주가들이 선호해 왔다.

백수를 바라보는 할머니 한 분을 찾아 뵙고 오늘까지 섬에서 살아온 화제를 다양하게 유도하기 위해 필자와의 대화는 마치 오래 간 만에 만난 조손간의 정겨운 장면과 같았다는 주임교수의 호평이었다.

1박2일의 일정을 마치고 오후 늦게 떠나려는 시각에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울렁거려 우리 일행들이 발목을 여지없이 묵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언제나 이 때는 단골 메뉴인 이백십일 태풍인 것을 우리는 사전에 모르고 온 것이다.

당시는 기상관측 시설이 전무해 예보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옛 어른들은 풍향, 구름형성, 습도 등 살아오면서 체득한 노하우에서 예상하며 살아왔다. 어는 노옹은 십중팔구는 맞는다고 한다. 특히 섬사람들은 섬 주변 바위에 부디 치는 절 소리만 듣고도 대강은 짐작이 간다고 한다.

피안에는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나 거세게 울렁거리는 파도와 세차게 흐르는 물살 앞에는 우리 인간의 나약한 존재가 너무나 무색해 졌다.

‘저 바다가 육지라면’

딱 맞는 말 같았다. 서귀포에 본부를 둔 시찰단에 SOS를 보낼 통신수단도 없다. 요즘 이 지경을 당하면 국가적으로 비중 있는 학술주사라 본부에서는 헬리콥터라도 날아올만 한데 당시에는 통신시설이 전무한 절해의 고도이었다.

안절부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저 주자앉을 수는 없었다. 동력선을 대절해 모슬포로 나오려고 이장님과 상의하니 하는 말이 "보리쌀 한 되 더 먹었으면 갈 일을 서둘렀다고 바다 건너갈 수 있겠는가" 난색을 토하면서 이왕 오셨으니 우리들과 며칠 더 지냅시다. 이래야 섬사람들이 삶의 맛을 서울 등지에 알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호기로 삼으려는 기색이었다.

혹시나 해서 도항해 줄 선주나 있을까 수소문 했으나 모두가 이장님과 똑 같은 말로 거절하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있는 그대로 꾸밈새 없이 살아가면서 은연중 길러온 '기다리는 마음'은 이 섬사람들만이 안고 살아가는 진솔한 참 모습이었다. 하루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암시적으로 시사해준 '조급한 심리'는 금물이라는 사실을 이번 학술조사에서 재확인 할 수 있는 졸은 기회가 돼 주었다고 섬을 떠나면서 소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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