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내일 모레면 제주 4·3이 67주년을 맞는다. 아직도 그 상혼(喪魂)은 악몽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글을 쓰고 싶어도 꾹 참기로 결심해 왔기에 이젠 글을 쓸 기력도 없다. 입 한번 방긋하게 열지 못하고 묻혀버릴까봐 그동안 간간이 담론을 해왔다.

그간 관련단체의 노력으로 반세기가 지나서야 4·3 특별법 제정을 근거로 하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아직도 몇몇 사건들이 가려지지 않고 있다.
수락석출(水落石出)이라 했으니 물에 바져 바위가 드러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아직도 짊어지고 가야 할 말 못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혹시나 남아있는 과제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릴까 염려된다.

늘그막에 그 때를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며 멋없이 중얼거리는 노랫말이 있다.

"돌아와요 돌아와 따뜻한 품안으로 종달새가 부르는..."

1979년 3월 춘계 대 토벌이 시작되면서 선무(宣撫)공작의 일환으로 귀순 권고삐라를 경비행기로 한라 산록에 뿌려 입산했던 선량한 주민들은 믿고 귀향했으나 석연치 않게 이어져 대(代)가 끊긴 집안이 있는가 하면 행방불명으로 오늘까지도 통한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사태진압에 나섰던 군인은 동굴 안에서 울고 있는 애를 보고는 차마 그대로 두고 이동할 수 없어 데려와 꼬마 군복을 만들어 입히고 군부대에서 생활하며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이웃 학반 담임이라 늘 대면할 수 있었다. 군인들의 온정으로 부모를 잃은 슬픔은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방실방실한 표정이라 쉬는 시간에는 짝꿍하려고 모여들곤 했다.

지금 이 하늘아래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만나보고 싶구나. 나이가 들어 난데없이 회귀욕구가 나 그런가 보다.

"돌아와요 돌아와" 풍금노래에 너도 같이 부르다 감읍(感泣)에 목메어 "우리어멍 어디가수과" 그 절규에 모두가 울어 마치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그 때 홀쪽이 선생도 이제 팔순 문턱에 선 하르방이 됐지. 이제쯤은 너도 고희를 맞은 젊은 하르방이 되겠구나. 그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숨만 난다.

그 때만 해도 공공연히 폭도니 빨갱이라 했지만 언제 너에게 "폭도새끼"라 했는가. 너를 따뜻한 품안에 안겨보려고 무던히 몸부림쳤지만 모진 하늬바람에 속살이 멍들고 말았지.
혹시 연좌제 사슬에 묶여 출세는 커녕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지 얼굴 모른 조상 탓으로 장래가 막히는 대물림의 그 아픔을 누가 알겠는가. 건드리면 몸삼이 날것만 같다. 이제 아물어 가는 부스럼을 긁으면 긁을수록 고통이 따른다.

그 울분을 삭이려니 긴 여정을 맥없이 허송했는지 안타깝구나 그래도 잊혀버려야 한다. 인생이 장애물 달리기라고 하지만 한 사람이 겪은 역경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험난한 시절을 우리는 보냈다. 이러니 요즘 할말 다하며 행복추구권을 마음 것 누리는 전후 세대들이 부럽다.

오염된 상수원 물을 마신 사람만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수원 오염의 주인(主因)을 찾아도 때는 늦은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난리에도 어떤 마을은 소실(燒失)되지 않음 뿐더러 총소리 한번 없이 태평천국으로 지냈으니 집안이 태평성사라. 조상의 음덕이 얼마나 높기에 그랬을까.

일년 중 시월 스무날만은 몰래 건너뛰었으면 한다. 이 날이 오면 섬쩍지근해 침통이 솟는다. 몇 집 건너뛰면 촛불이 가물거리고 향내가 풍겨 제삿집임을 알 수 있다. 일명 밤 명절이라. 온 마을은 침묵의 밤이다. 먼 훗날, 누가 묻는다면 지혜로운 자 역사책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 몸소 피눈물로 배운다는 교훈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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