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한라산은 명산이고 영산이다. 첩첩 산이 아니라 홀 산인데도 우뚝 솟아올라 제주의 숱한 역사를 깊이 간직하고 있다. 또 어머니의 푸근함을 안겨줄 정도로 여유가 있어 친근감이 든다. 해안선 따라 일주하면서 한라산을 보면 보는 곳에 따라 천태만상이라 감상도 달라진다.

멋없이 오래된 일인데도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우연히 제주 삼읍사람이 다 모인 자리이었다. 산북에서 보는 한라산은 험령이 뻗어있어 남성미가 돋보인다. 그래서 산이다. 산남에서 보는 산봉은 신비한 자연의 조각품이라 웅장하면서도 온화한 여성미가 있다. 동서지방에서 보는 한라산은 미미하면서도 쭉 뻗어 내린 능선과 아기자기한 오름이 볼수록 풍만해진다고 한다.

제주의 선인들은 한라산을 종산으로 섬기며 마을마다 숭상해 온 자연 현상물이 많다. 또 제주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도 산과 바위를 그리고 넓은 바다를 마음에 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제주를 말하면 으레 영주 10경, 우도는 8경 등 자연을 음미해온 구절이다.

뭐니뭐니 해도 내 마을에서 보는 한라산이 제일 좋다는 것이었다. 서귀포시 강정 마을 세별동산에 서면 마라도, 가파도, 송악산 형제섬, 모슬봉, 산방산 군산, 거린 사슴 오름, 녹하지 오름, 영실계곡, 한라산, 고근산, 동쪽으로 쭉 늘어진 능선 삼매봉, 문섬, 범섬 등이 한 눈에 들어와 아마 제주 섬에서는 이렇게 확 트인 곳이 없다며 옛 선인들은 자랑삼아 말해 왔다.

세상 모든 것이 변모했지만 산세는 예나 지금이나 그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한라 산세를 세상사로 이은 화제가 있었다. 말 한 자와 들은 자도 세상을 떠나 버렸다.

필자는 선인들이 들려주던 그럴싸한 이야기가 영 지워지지 않아 세별 동산에 나가면 늘 조망하며 감탄하고 있다. 마라도에서 한 촌 노가 세상을 하직한다. 그러면 망인의 흰 적삼을 들고 가파도에서 혼을 부른다.

송악산 형상이 마치 장지로 나가는 운상 행렬과 유사하다. 형제섬은 아들 형제 상주가 애고 애고 하며 따라가고 있다. 파도소리가 곡소리로 들려온다. 군산은 봉오리가 두 개로 돼 마치 장 밭에 친 장막 형세이다. 산방산은 무덤이 완성된 봉분과 같았다. 산세를 음미하다보니 이런 화제가 나온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이 아름다운 내 고장 자연 풍광에 매료돼 화폭에 담아두고 싶어졌다.

1947년 그림 한 점을 과제물로 제출하게 돼 성안에 가서 물감 칠 하려고 스케치만을 하고 버스에 승차했다. 당시 4·3 사태라 양민증이 발부되고 요소마다 경찰 검문소가 있어 승객들을 전원 하차시키고 소지품과 화물까지도 샅샅이 검색해 댔다. 고산검문소에 나와 있는 경찰관은 육지부에서 지원 나온 경찰이라 제주지세를 모르고 있었다. 필자 소지품은 이불과 쌀, 부식인데다 이상한 지세를 그린 도면이 나왔으니 산사람(당시 폭도)과 내통하는 자라며 끌려가 심문 받았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날로 애착심이 생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970년대 공용출장 연수로 이태리 로마를 경유하게 됐다.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로 알려진 나포리 항을 보는 순간 감탄은 커녕 제주의 풍광이 떠올랐다.

서귀포를 기점으로 해 송악산 까지 이어진 굴곡 많은 해안선에 펼쳐진 자연풍광은 영상자료 아니고는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언젠가는 세계로 알려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 온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올레 문화에 접목시켰으면 행객들에게 제주의 자연 풍광을 만끽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올레 7코스 행객들 가운데 나포리를 본 사람은 이 7코스가 나포리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또 선인들이 산세에 얽힌 한 토막이다. 지난 1960년 총선으로 출범한 민주당은 같은 해 12월 도지사 선거를 실시했다. 산남에서 출마한 강성익씨가 당선돼 '대 제주건설'이란 정책을 내걸었으나, 5.16정변이 일어나 취임 5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라산의 산세가 너무 가파르니 산남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가 단명 한다며 '백과 연줄이 없음'을 은밀하게 연유해 말했다.

옛 선인들은 마을을 감싸주고 있는 오름, 산, 바위, 섬, 폭포 등 자연 현상을 마을 상징물로 여겨 신성시해 오고 있다. 마을 포제단을 그곳에 설치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 한 것이다. 몇 마을을 들어보면 효돈에 월라봉, 보목마을에 섶섬 문필봉, 예래마을은 군산봉, 화순·사계마을은 산방산, 제주 선인들은 자연 자산을 잘 보존 전승해 왔기에 세계인이 바라보는 세계환경수도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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