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면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꽃무늬 카시미롱 이불이었다. 방금 누가 덮고 누웠다가 나간 듯,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불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해녀 할망이 계시다가 나간 것이 분명했다.

할망의 요람 앞쪽에 놓인 커다란 나무 탁자에 앉았다. 부엌으로 보이는 한 켠에서 젊은 아주망이 나오더니 커다란 생수병에 담긴 막걸리 같은 것을 김치냉장고에서 꺼내는가 싶더니 냅다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흔드는 폼이 칵테일바의 바텐더는 저리가라 였다. 얼핏 보기에는 막걸리 같았다.

"이게 쉰다리라는 건데  잡숴 보셨어요?"
또렷한 뭍의 말이었다.

"네, 말은 들었는데 아직 못 먹어봤어요. 이 집이 맛있다고 해서 왔어요"

"맞아요. 우리 어머니 쉰다리는 아주 특별해요. 누룩에 꽃이 피는데 우리 어머니 누룩에는 빨간 꽃이 펴요. 그럼 굉장히 맛있게 돼요. 빨간 꽃이 피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우리 어머니 누룩은 웬지 모르지만 할 때마다 빨간꽃이 펴요. 제가 생각해도 신기해요. 우리 어머니는 손에 특별한 기운이 있는 거 같아요. 아픈 사람들도 어머니손이 약손이라고 찾아와요. 음식도 하시면 뭐든 맛있어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딸의 모습에 내가 괜히 기분 좋아졌다. 제주에 와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어머니가 해녀였다는 사실을 살짝 부끄러워하는 자식들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고 그 덕에 자신들이 먹고 살고 공부해서 오늘날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정작 어머니의 일에 대해서는 굳이 꺼내놓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든 흔하면 귀한 줄을 모르듯이, 여자 많은 삼다도는 여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없다. 게다가 해녀는 역사적으로 착취의 대상이었다. 목숨걸고 바당에서 따 온 것들은 상전에게 바쳐야 했으니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또 과거에는 물질할 때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나잠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유배 온 양반들이 허세에 찬 품위를 내세워 그들을 무시했던 것이 하나의 사회적 분위기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할망의 딸은 어머니를 깨알같이 자랑하고 있으니 얼마나 이쁜가. 나는 이 복많은 할머니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할머니는 물질을 나가셨고 오실 때가 거의 다 된 모양이었다. 딸은 어머니가 나오시면 곧 드실 수 있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노라 했다.

"할머니는 행복하시겠네요, 좋은 딸을 둬서"

바삐 손을 놀리던 딸이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알아주니 고맙다는 뜻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 며느리예요"
"어머나! 그럼 더 복이 많으신 거죠"
"대신 남편과 아들이 속썩이잖아요, 하하하"

더 들을 것도 없이 '견적'이 딱 나왔다. 남편 복 없는 두 여자가 동병상련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구나. 그런데 이 호탕한 웃음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뭔가 한 경계를 넘어선 내공이 느껴져서였다.

"처음에는 저도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오신 분이 어떻게   저리 웃을 수 있는지... 우리 어머니는 늘 웃으세요. 웃는 모습이 정말 아이들 같으세요. 호호호"
내가 보기엔 며느리도 만만찮게 잘 웃는다.

"어머니랑 지내다보니 저도 어느새 잘 웃게 된 거 같아요. 아직 나이가 젊어 그런가, 한번씩 성이 날 때도 있고 애들 키우다 보면 확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와 몇 년 살다보니까 그런 것이 올라와도 이젠 웃게 돼요, 저도 이상해요, 호호호"

야, 이거 내가 제대로 잘 찾아왔네. 안 그래도 요즘 조금만 화를 내도 뒷목덜미가 후끈해지고 밤에 잠도 쉬 오지 않아 무슨 수를 내야 할 판이었는데, 오늘 인생살이 신의 한 수를 또 배워가겠구나.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할망카페의 주인 할망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체구, 나를 보며 말없이 쓱 웃는데, 제주어 '빙삭이 웃으멍'이라는 말이 확 와 닿았다. 상상해 보시라. 약간 갸름한 얼굴형에 이마의 주름이 눈썹의 선과 한 줄기로 흘러내리고 입꼬리는 올라간 모습, 영락없는 하회탈 아닌가. 나도 덩달아 '빙삭이'가 되고 말았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녹여, 얼굴 가득 지어내는 한 줄기 웃음, 할망을 기다리며 며느리에게 귀동냥해 들은 그 분의 신산했던 삶, 그 삶을 엿물 다리듯 긴 세월을 다려내 달디단 웃음의 엿가락을 만들어내셨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내 무릎을 쳤다.

쉰다리! 쉰다리! 할망의 모습은 쉰다리였다. 상한 밥을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쉰다리, 유산균이 가득하여 위장병과 변비에 뚫어 뻥이라는 쉰다리, 버릴 것이 가장 유익한 것이 되는 이 반전! 객관적으로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울 삶이 할망을 관통하면서  웃음이 되어 행복을 주고 있으니, 할망이야말로 쉰다리 자체가 아니겠는가. 아니, 할망이 누룩이다. 누룩의 빨간꽃이 바로 할망이다.

며느리는 쉰다리병을 흔들면서 자신의 삶과 상한 속을 흔드는 건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이 잘 섞여 한줄기 웃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쉰다리 한 병을 샀다. 집에 돌아와 능숙하진 못해도 열심히 흔들어 한 잔을 따랐다. 잔 앞에노래 한 곡이 빠질 수 있나.

"차디찬 글라스에 빨간 립스틱... 깊은 까페에 여인... 주루룩 주루룩 주루룩 주루룩 밤새워 내리는 빗물... 생수병 쉰다리에 누룩 빨간꽃 ... 섶섬앞 카페에 할망... 까르륵 까르륵 까르륵 까르륵 밤새워 터지는 웃음"

하하하, 나도 쉰다리가 되어간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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