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서른 네 살 때 쯤일까? 나에게 살짝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났었다. 라디오의 상담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연휴를 앞두고 장시간 녹음을 하던 중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공포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그날의 출연자가 신경정신과 전문의사여서 나는 재빨리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넓은 공간으로 나간 것이다. 방음용 두꺼운 밀폐문을 밀치고 진공용기 같은 스튜디오를 벗어나 햇볕과 바람이 있는 밖으로 나오니 깊은 숨이 쉬어지면서 좀 살 것 같았다.

방송을 마치고 의사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나를 진료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없었어요"
"최근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나요?"
"네"

갑작스런 이혼과 나를 무척 아껴주셨던 시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두 돌잡이 딸아이, 급기야 나는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나이가 지긋한 그 여자의사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며 내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진단을 내렸다.

"공황장애 같아요"

말만 들었던 공황장애가 나에게 오다니!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약을 먹어야 하나? 한순간에 머릿속이 엉켜들었다. 그러나 그는 노련한 의사였다. 내 속내를 금방 간파하고는 여러 가지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좋은 처방을 알려주겠다며 내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거나 마음이 편한 장소가 있으세요?"

있을 리 없었다. 아침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방송과 전국 강연으로 종종 걸음치던 시절, 나의 좌우명은 '바쁜 꿀벌은 근심할 겨를이 없다'였다 생각할수록 분하고 우울한 상황을 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바쁘게 살고 있었으니 그런 공간은 팔자좋은 사람들 몫이라 여겼었다.

"그럼, 고향은 어디예요?"

고향? 출생지를 물으면 인천이라고 금방 답했지만 그곳을 고향이라고 표현한 적은 없었다. 출생지와 고향의 차이는 꽤 큰 것이었다. 출생지가 사무적이라면 고향은 정서적이었다.

"고향에 어릴 적 자주 가던 추억의 장소 같은데 가보세요. 마음이 안정될 겁니다"

처방전이 약도 아니고 상담도 아니고 고향방문? 공간이 치료가 된다구?

고향가는 길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 내가 살던 서울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 그러나 거긴 딴 세상이었다. 자유공원 비둘기집 앞에 서는 순간 나는 단숨에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여중생이 되고 말았다. 단발머리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이 하나 둘 떠올랐다. 하교길에 여기 벤치에 앉아 비둘기들을 보면서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 그 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가, 그리움이 밀려왔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잠시나마 철없이 마냥 행복했던 시절에 다시 머무른 것, 그건 안식이었다. 치료차원의 안정을 넘어 깊은 위로와 더불어 삶의 무게를 짊어질 새 힘을 주는 힐링이었다.
 
공간의 힘,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으로 하여 치유를 가능케 하는 그 힘을 새삼 다시 느낀 것은 서귀포에 살면서 였다. 서귀포에 남아있는 오래된 이발소를 지날 때면 내 코끝에는 어김없이 아버지의 포마드 냄새가 났다. 살아계시면 올해 92세가 되셨을 아버지, 돌아가신지 꼭 40년이 된 아버지를 뜻밖에도 나는 서귀포의 오래된 이발소 앞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 담쟁이가 가득 덮힌 오래된 문방구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들의 보물섬이던 그곳을 추억하게 했다. 베이커리가 아닌 빵집이라는 간판 앞에서 저절로 가슴이 설레이는 건 동그란 팥빵을 놓고 마주 앉았던 까까머리 소년이 머릿속 편지함에 저장된 까닭일 터이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도 막상 찾아가기는 아파트보다 더 쉬운 꼬부라진 골목길들, 그 길을 지켜주는 오래된 담장들과 낡은 대문, 아는 사람집이 아니건만 열린 대문 틈으로  가래머리 친구가  뛰어나올것 만 같아 공연히 발이 머물고...

내 어릴 적 추억의 풍경들이 남아있는 이곳 서귀포, 나는 이 오래된 것들을 찾아, 고향을 찾아 여기 온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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