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증언에 앞서 서귀포 삼매봉 황우지 해안가에 있는 일본군 진지 12동굴 구축 작업시기인 1945년 필자는 서귀포 남(南)소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설립된 학교로 심상과(1-6)에는 일본인 자녀 30여명, 고등과(1-2)에는 한국인 2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제주 섬에 미군이 상륙하면 맨주먹으로 그리고 죽창으로 무찌르겠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일본인 재향군인들은 운동장에 미국인 표적을 세워 놔 백병전과 다름없는 죽창검술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지금의 남성마을과 삼매봉 근처는 군사기지로 통제구역 이였으나 고등과 한국인 학생 20여명에게는 군 당국에서 근로보국대 깃발이 발부돼 통행이 혀용돼 진지동굴작업 광경을 멀리서나마 지켜봤기에 사실(史實)을 입중하기 위해 증언하는 것이다.

◆삼매봉 황우지 해안가 일본군 진지12동굴은 왜 팠는가

미군이 파죽지세로 본토를 침공해 오니 제주 섬을 최후의 방어진지로 구축하기 위해 주로 산남 해안가(삼매봉 황우지, 대정 송악산 성산포 일출봉)에 진지동굴을 팠다.
이 굴을 파기에 동원된 인력은 육지부에서 징용당한 한국인이었다. 제주의 우리 조상들은 모슬포 군용비행장과 제주 정드루 비행장(지금의 제주국제공항)건설과 중 산간지대 진지구축, 탄약운반에 징용 당했다.

이 시대에 흔히 하던 말이 징용을 "공출"이라고 했으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이 일제 학정하에 당한 핍박과 수난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물자 마냥 양적으로 따진 인간경시 풍조다.

1945년경에 지금의 남성마을 근처에 해안가 진지동굴을 파기위해 강제 징용자들의 숙소라는 함바가 즐비하게 지어졌다.

삼매봉에 근로봉사 가는 길목이라 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수용시설은 초가 움막과 다름없고 내부에는 가마니 깔아 잘 정도이니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작업복이 지급되지 않고 입고 온 한복 바지 저고리 차림이었다. 급식은 강냉이 밥을 먹인다고 하나 소량이라 배고파 도망치고 서귀포 내항에 버린 복어 알을 먹어 죽었다는 등 소문이 나돌아 "복어 알을 먹으면 죽는다"는 졸렬한 경고판을 보면서 모두가 경탄(敬歎)했을 뿐 속수무책 방관하던 비정한 세상이었다.

우리들은 근처 언덕위에서 작업광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곡갱이와 삽만으로 파내고 때로는 폭약을 터뜨리는 폭음도 들렸다. 당시 장비로는 굴 안에서 파낸 흙을 밖으로 운반하는 네루 시설은 있었으나 굴착기는 없었다.

▲ 황우지 서쪽 존착지 해안과 일제의 땅굴(황우지굴·열두굴) 전경.

◆이 진지동굴의 전략적 용도는

평상시에는 어뢰정(艇)을 굴 안에 은폐해 두었다가 적함이 출몰하면 폭탄을 적재하여 돌진할 특공대 육탄전 진지었다. 채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이 진지동굴이 재 기능이 발휘할 수 있는 전황이 됐다면 미군 함정에서 쏘아대는 포화로 제주 섬은 포토화 됐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뭤을 믿었는지 제주섬을 지켜주신 선인들의 예지에 감탄(感歎)해 진다. 이런 전황(戰況)을 감지했는지 연고지를 찾아 육지 오지(奧地)마을로 피신 이주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이 진지동굴을 이용할 특전정예 부대는 서귀포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속어뢰정은 서귀포 내항에 일반 선박의 소형보드 마냥 위장해서 새섬 가에 정박시켜두고 있었다.

통신매체가 전무해 전세(戰勢)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늦장 우편 배송되는 "소년신문" 만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소식지이었다. 유황도 옥쇄(玉碎)기사를 보니 우리 간에도 한때 싱가폴 함락이니 외쳐대던 일본군도 이제는 열세라 옥쇄 하는구나. 일본 애들이 하는 말은 딴 판이었다.

미국이 곧 항복 할 것이라고. 게다가 일본인 사와무라 장이지(澤村 人一)교장은 일본군 상등병 출신이라 황우지 해안가 진지구축에 관한 시사문제를 소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서 전세가 이렇게 긴박해 졌으니 군 지휘본부에 1개교실 사용을 허용했다는 딱한 경위를 설명하며 학생들의 이해를 구했다.

그날부터 운동장에 들어서면 일본 특유의 된장국 냄새(미소 시루.味醬 汁)가 코를 찔렀다. 수업은 학교 모퉁이에 팽나무 아래서 공부하다 공습경보가 발령되면 방공호에 들어가곤 했다. 오후일과는 태반이 삼매봉 근처 기관총 포대구축작업에 보국근로작업이 일과이었다.

서귀포 내항 새섬 가에는 해군 소형 초고속정이(10척 이내로 추산) 노출되지 않도록 어선과 같이 은폐하여 정박해 두곤 했다.

이 고속정은 해상으로 침공해 오는 미군 함정에 육탄전으로 돌진하려는 악명 높은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와 다름없었다. 훈련 시에는 교실 창문 커텐을 내리라고 한다. 그래도 호기심으로 창틈으로 보면 내항에서 수평선까지 질주하는데 선체는 보이지 않고 하얀 물살만 보였다.

서귀포에는 육군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을 뿐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때로 일본 요리집에서 술에 만취돼 대낮에 솔동산을 활보하며 "마나스 보당와 사꾸라는 히가리"(일곱개 단추 달린 우리 특공대는 일본 국화 벚꽃과 같이 함께 진다) 군가를 부르며 휘청거리는 군인은 이 특공대원들이었다. 부녀자들은 무서워 골목길로 피하고 장도(長刀)를 차 기세부리던 헌병도 상황을 알아차려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시비하는 사람도 없으며 못 본체 피해 가곤했다. 모두가 이렇게 관대하게 감싸 주는 것은 지금이라도 적함이 출몰하면 지체 없이 돌진해 산화할 군인이기에 동정심에서 특별 배려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보기에도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18세 또래의 젊은이들 군국주의 교육의 산물로 오로지 천황폐하에 이 목숨을 받쳐 야스쿠니 신사에 가는 것이 최대 영광이라는 충성심이 열혈(熱血)해 보였다. 단추가 일곱 개나 달려있어 젊은이들은 나도 한번 저 복장차림으로 나서고 싶을 정도로 정복이 멋 보였다. 그 기백 한번 발휘하지 못하고 8.15를 맞았으니 얼마나 분통했을까. 우리에게는 조국광복이요 핍박받던 일제 36년에서 해방된 것이다.

나라 잃은 우리민족의 노예와 다름없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악랄한 십장의 채찍질을 받으며 파낸 진지동굴에는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황우지 12동굴 파인 자국에는 민족의 한(恨)이 빗물이 돼 고이고 설움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을게다.

외돌괴 명승지에만 매료돼 아는 자가 없으니 눈여겨 보는 자도 없다. 한때 일본군이 점령지였던 동남아 섬에서 이와 유사한 진지동굴을 필자는 봐왔다. 그 가운데 한곳을 든다면 타이랜드의 악명높은 콰이강의 다리이다. 철로따라 가던 기동차도 여기에 닿으면 추모 서행하며 동굴 안에는 누가 켜 놨는지 촛불이 가물거리고 승객들이 국화 송이를 헌화하는 숙연한 모습을 보면서 경모감이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는 못할지언정 조망대에서 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진 잡목과 넝쿨만이라도 누가 말끔히 전정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주위환경을 잘 가꾸어 보자. 그래야만 과거 아픈 역사에서 밝은 미래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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