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변마을 바닷가에는 돌담으로 두른 원형 모양의 불턱과 제주만의 독특한 어로방식인 원담이 있었다. 불턱은 돌담 구조물이라 규모는 다르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풍속도는 마을마다 다를 것이다.

불턱은 바다작업 시작과 끝맺음을 하는 곳이며, 해녀들이 삶을 이어가는 삶터였다. 돌담을 쌓아 바람막이로 만든 불턱은 거친 파도를 헤엄쳐 뭇에 나온 여인들을 포근하게 안겨주는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곳 이었다.

‘여인 셋이 내뱉는 입 살에 사기그릇 구멍 뚫는다’는 함구는 있으나 이 불턱 안에는 엄한 계율이 있어 항상 바다를 신성시하는 몸가짐이 산 교육장이었다. 불을 꾀려고 앉을 때도 상군(上群)자리를 비어둔다던지 위계질서가 분명했다.

물질 배워 가는 과정도 학교과육과정과 유사하다. 수심이 얕은 곳은 초년생들이 물질 터로 내줘 소라 점복이 많아도 상군들은 입어하지 않는 미덕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동기부여 과정이다.

일이년에  숙련되는 것이 아니라 상군 칭호를 받으려면 십여년 수심이 얕은 곳에서 점차 깊은 곳으로 옮겨가며 물질 바다 밑을 책장 들여다보듯이 생태환경을 알고 있어야 단숨에 잠입해 보물(소라, 해삼, 전복)을 캐들고 나올 수 있다. 이때 어른 손바닥만 점복을 캐들고 내 뿜는 숨비소리(호-이)는 과시요 포상이다.

상군들은 늘 후배들에게 바다 밑 보물들은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숨 떨어지는 줄은 모르고 한 개 더 캐려고 하다 물 밑 귀신 된다. 과욕은 절대 금물이다. 있는 곳 봐두었다 내일 캐자. 안전수칙 제1호 "과욕은 절대 금물"이다 일러준다.

그래도 유명을 달리한 해녀들이 몇 분 있다. 이럴 때는 애도기간으로 물질을 중단한다. 바다도 슬픔을 파도와 함께 술렁거린다. 이런 와중에도 즉흥적인 묘안이 나와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린다.

이곳 불턱에는 늘 소라 전복을 구워대는 구수한 냄새로 행인들을 유혹한다.포구에 고기 사러 왔던 윗드르(산촌마을) 남자가 근처에 서성거리고 있으면 해삼이나 개웃(전복내장) 맛보라며 유인한다. 젯밥에 한 눈이 팔린 이 남자는 불턱 안에 덥석 들어섰다가 해녀들은 "어디 왔느냐" 벗어 두었던 속옷을 머리에 씌워 전신을 타박해댄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한 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길목에 표지판은 없지만 해촌 사람들은 별 보물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는 절대 금남구역임을 어릴 적에 이미 알고 있었다. 물질하러 나와도 젖먹이 애 걱정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전복구이였다. 애 손바닥만 전복을 누렇게 구워 질긴 끈으로 꿰어 앞가슴에 달아주면 어미 젖꼭지 마냥 물어 빤다. 그러면 아직 치아가 나지 않았으니 끊어 먹지는 못하고 전복 진액만을 빨아 먹으므로 유아 건강식품으로는 최상이라 선호도가 높았다. 몰래 핥다먹는 얄궂은 애기 업게도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기발한 착상이었다.

불턱 안 한 칸에는 몸에 묻은 해수를 말끔히 씻어내려고 담수 물줄기를 끓어들려 만든 작은 물통도 만들어 놨다. 한 가운데는 불턱이 있어 물질하는 날에는 계절구분 없이 불턱 장작불을 피운다. 동절기에는 무자맥질 작업하다 나오면 살을 애일 듯 불어오는 하늬바람 한기에 이 불턱 불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곳이었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옹기종기 앉아 희노애락을 나누며 고달픈 하루를 보낸다.

강정마을은 해변에 위치해 나무 땔감을 얻으려면 몇 참 길을 올라가야 한 짐 짊어져 오는 형편이라 불턱 불 피우는 장작 구하기가 여간 어려웠다. 장작에도 등급이 있었는지 통시에 들어갔던 오물 묻은 나무와 닭똥 묻은 나뭇가지를 모아 두었다 바다로 나갈 때는 태왁구덕 밑창에 끼고 가는 것은 통상관례로 돼 있었다.

빈 구덕 짊어지고 가면 체면 없어 불턱 가에 갈 수 없다며 수소문해가며 모아둔다. 어찌하다 오염된 것들이 정지 아궁이에 들어가면 동티날까봐 염려하면서 살아오신 선인들도 일찍이 공해추방 친환경조성을 몸소 실천해 온 것이다.

여인들의 한(恨)을 달래주며 삶을 조명해온 불턱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곰보돌담 불턱은 현대식 작업장으로 변모돼 금남구역도 없다. 물옷은 고무 옷으로 오리발까지 제 장비가 새로워졌다. 즐비하게 세워 논 오토바이, 마중 나온 경운기 등 불턱의 풍속도는 해산물 공판장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 돌담 원은 아무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변지형을 봐서 터를 잡았다.

원은 제주선인들의 예지를 모아 조성한 독특한 원시적인 어로 시설이다. 안쪽은 성담 마냥 직각으로 쌓아 올리고 밖 앗은 바다 돌로 길게 30도 경사로 늘러 놔 주변 바다 밑과 똑같이 조성한다. 그래야만 어족들이 갓으로 밀물 따라 모여든다는 착상에서 만든 인공시설이다.

강정마을 해변에 이런 돌담원이 규모는 다르나 여섯군데나 있었다. 동네 이웃끼리 원담을 수축하기 위해 계(契)를 조직한다. 원담 밑돌쯤은 왕석을 놔 해일이 밀려와도 밀려나지 않도록 견고하게 구축해 놨다. 왕석을 옮기는 기법은 힘이 아니라 해수부력을 이용해 쌓았다고 한다.

계수(契首)로 불리던 노옹이 권위는 대단했다. 항시 원을 돌아보며 허물어진 곳을 수축하는 일, 물끼(7물-9물)에 윗드르(산촌마을) 사람들이 보말 잡기 위해 혹시나 원담을 허물까봐 돌담 망루에 올라앉아 거동을 살피다 호통치는 기세는 대단했다. 그래서 호랑이 영감이라 불렀다.

주민들은 원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초여름쯤에는 돌고래나 상어류가 멸치 떼를 먹이로 추격하는 통에 연안근처에 몰려왔다가 썰물이 나면서 원담에 막혀 맴돌다 사들 망에 걸려들고 만다. 어부로부터 멸치 떼가 앞 바다에 회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그물 망(사들), 멸치 담을 대나무 구덕, 갯바위를 누벼 다니는데는 낡은 짚신이 안성맞춤이라 꺼내둔다. 어느 원에 멸치가 든다는 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새벽잠은 바다 빌레 바닥에서 모기보다 독기가 심한 복따기에 시달려 뜬눈으로 지새운다. 원담이 해면에 나오면 계수는 눈살 빠른 젊은이 세 사람에게 "멸치가 원에 들었는가 돌아보게" 하명한다.

보고를 받은 계수는 적기에 개시 선언한다. 좋은 멸치 회유 길목을 선점하려고 갯바위를 달려가는 용감무쌍한 젊은이들. 첫 사들을 올리며 "멸이야" 외치는 함성에 야시장 못지 않은 진풍경이 연출됐다.

비(非)계원이 잡은 멸치는 다소를 불문하고 활분제가 적용돼 나누어 갖는 것이 통상관례라 거역할 수 없었다. 자리젓과 멸젓을 담아두는 것은 안살림의 기본이라 바다 풍년을 맞은 것이다.

한철을 지나고 나면 원에는 소량이 닷치(가시놈) 오징어 따위가 들어와 애들이 심심풀이가 돼 바다로 나간다. 섯동네 어른들이 조성한 곳은 안강정 원이다. 자자손손에게 승계권이 이어져 왔다.

이제 현대문명이 거센 물살에 밀려 돌담원은 흔적 없이 말끔히 휩쓸어가 검은 바위만 앙상히 드러내 밀려오는 파도와 입씨름으로 옛 풍상을 말해주고 있다. 다행이 요 근래 모살원이 복구돼 간간이 멸치가 들어 옛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원담과 해녀 물질작업을 유산으로 지정 신청한다니 만시지탄이나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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