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마흔 아홉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그이는 날랬다. 해는 떴지만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시각, 풀이 우거진 좁은 길을 지나 바다로 향하는 가파른 내리막을 단숨에 척 내려간 그는 바닷가의 들쭉날쭉한 돌들 위를 저벅저벅 평지처럼 걸었다. 기념사진 찍을 전망 좋은 곳을 찾아준다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아이고, 여기가 홍합 밭이네, 밭"
손톱만한 홍합들이 수백개 다닥다닥 붙어 한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보물섬을 발견한 듯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음식으로 만들어진 홍합만 본 내 눈에는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만지지 마세요. 손을 대면 위협을 느껴서 바위에 딱 달라붙어요."
과연 그랬다. 콩알만한 녀석이 제 무리의 틈에 어찌나 단단하게 붙어있는지 한번 따보려 했는데 꼼짝을 안했다.
"대단하지 않아요? 만약에 한 개씩 있다면 따기가 쉬울 거예요. 이렇게 뭉쳐있어야 산다는 것을 얘들은 다 알고 있어요, 사람보다 똑똑하죠? 하하하"
그는 나비처럼 저만큼 가 있는데 나는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보다 똑똑하죠?’ 그 말이 내 목구멍을 뻐근하게 지나고 있었다.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말투나 외모로 제주 토박이일거라 짐작했는데 갑자기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와아, 이 돌은 완전 그릇이다"
그가 저쪽에서 또 소리쳤다. 정말! 나뭇잎모양의 그릇이 돌바닥을 밥상 삼아 놓여진 것 같았다. 그는 언제 땄는지 손에 들고 있던 홍합을 그릇에 담고 진짜 그릇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그릇을 붙잡는 시늉을 했다.
"가만있어, 그대로 가만 있어"
나는 이 신기한 장면을 놓칠세라 언제 봤다고 반말까지 하며 급히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 사진의 재미는 그 자리에서 바로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 그이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애들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그 순간부터였다. 내가 한바탕 소꿉놀이에 휘말리기 시작한 것은. 그를 따라 두려움 없이 돌들 위를 누볐다. 돌틈에서 미역줄기, 우뭇가사리, 나무뿌리들을 발견하면 감탄하며 깔깔웃고 사진찍고 그 사진을 보고 다시 웃고...시간도 잊고, 아침밥도 잊고 오늘 할 일도 잊고 나는 그저 바닷가의 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겉만 어른이지 속은 완전 아이였고.
"우리 엄마가 해녀였어요. 어려서부터 바닷가에서 이런 것들하고 놀았어요. 돈주고 장난감을 살 형편도 아니었지만 지금보면 자연의 장난감은 사람이 만든 것과 비교가 안 되게 대단하죠. 생명이 있는 거잖아요. 이 돌도 가만이 있는 거 같지만 살아 있는 거예요. 매일 바닷물을 만나고 홍합이나 보말하고 붙어살고... 이 돌 모양을 보세요. 신기한 모양이 얼마나 많게요."
그의 핸드폰 속에 각양각색의 돌들이 들어있었다.
"이 돌은 먹는 빵종류, 파이 같지 않아아요? 내가 배고플 때 찍어서 그런가? 하하하"
정말 파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리 얇게 여러 겹 쌓인 돌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저 신기, 신기,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뭍에서 이사 온 지 일년도 안 된 사람이예요.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바닷가를 걷기만 했지, 바다에서 놀아본 건 처음이예요. 홍합이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거랑 돌이 살아있다는 거랑 가르쳐주고 고마워요
내 말에 멋쩍어하는 그의 얼굴이 금새 붉어졌다.
"근데 제주 사람들은 이 돌들이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냥 다 깨뜨려서 건축자재로 쓰는 거예요. 이러다가는 화산석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아요. 그때는 화산이 다시 폭발해서 돌을 새로 만들어낼까? 아, 그래서 요즘 한라산이 다시 폭발할 지 모른다는 말이 떠도나? 그런 거 같지 않아요?"
심각하게 두 눈을 꿈벅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 아무래도 어른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그 순수함이 그냥 자연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자연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자연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