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세대변화로 요즘 혼인잔치는 하루로 끝나버려 옛 옹골진 잔치는 찾아 볼 수 없다. 잔치엔 먹으러 가고 장사가 나면 큰 일 났다고 말했다.

세간에 강정마을 경조사에 다녀 온 사람들은 고기점이 크기가 애 손바닥 만 하더라, 절변 솔변 떡도 맛 있더라 게다가 잔치 때 먹은 팟 든 통 보리밥 맛은 강정마을 별미라며 극찬을 해댄다.

고기점이 크다는 것은 타지방에 비해 돼지를 많이 잡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감이 오랜 경륜에서 얻은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도감 빌지 않으면 잔치 망친다. 도감마다 인정마크가 따라 있었다.

음식이 푸지다는 것은 강정마을 토양이 비옥해 생산되는 각종 미곡 질이 좋아 오일장에서도 강정 쌀을 사려고 길목을 지켜 설 정도로 선호도가 높았다.

예전에 잔치집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바람 타 온 동네 풍겼으니 외방 손님쯤은 냄새만으로 근방에 갈 수 있었다.

혼일 전날 황혼이 깃들 무렵에 가문 친족들이 모여 앉아 혼사 당일 역할분담을 공론화 하는 가족회의가 곧 가문잔치이다. 남자들은 마당에 멍석 깔고 천막을 쳐 판자 문짝 떼다 간이식탁도 만든다. 오붓한 노천 방이다.

동네마다 큰일 때 사용하려고 마련해 둔 나무 조립식 도감소 가게를 꾸민다. 도감소 위치가 좋아야 고기 부정유출을 막고 또 밥상에 고기반이 따라 나갔을 수 있도록 작업동선을 염두에 둬 집 뒤 공간에 짓는 것이 태반이었다. 영 이런 공간이 없으면 눌 틈새에 마련한다. 도감소는 통제구역이라 혼주 내외와 반 나누는 사람만이 출입이 허용돼 있었다.

고기 삶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역사(役事)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 두 달 전부터 부탁해 둬야 다른 잔치에 가지 않고 수고해준다. 그래서 평소에 대인관계가 원만해야한다. 동네 공용비품인 큰 가마솥에 돼지고기를 삶아내는 비법이 있어 고기를 잘못 삶았다가는 잔치를 망치고 만다. 고기부위별로 넣어 장작불 열도를 맞추어야 되고 잘 삶아졌는지 검침하는 기법도 있었다. 새(띠)침을 꼽아 육감으로 판정한다.

적기를 놓치면 고기가 녹아버려 칼질을 못한다. 좀 있다가 꺼낼 것을 내 놨다 피 물이 묻은 고기라 차마 내 놓을 수 없어 두불 삶다보면 질 양적인 손실이 생겨 혼주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른다. 그래서 소문 난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 한나절 삶아 낸 고기를 도감에게 부위별로 순대부터 내장까지 인계한다.

이러는 사이에 권당들은 구들방에는 어른들, 마루방 낭간 마당에 이르기까지 모여 앉는다. 정지에도 고기 도감과 맞먹는 소문난 솥밑 할망에게 밥짓는 전권을 위임하고 있다. 밥이 으뜸이라 선밥이 나오든지 손님들은 들어 다치는데 밥이 모자라 머뭇거리면 청객이 호통치는 소리에 손님들도 감지돼 잠시 대기하게 된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밤새 밥을 지어 큰 벼짚 망댕이에 담아 헌 이불로 싸 이불로 보온해 둔다. 전기가 없는 시대라 가문잔치는 호야 불 껴 놔 하려니 동네 호야, 등잔을 다 빌려와 손질해 둬야 된다. 이 일은 애들이 전담해 왔다.

팥든 통보리밥에 톳 삶은 국물, 게다가 어른들은 탁배기 가양주 한 사발을 냉큼 들이 마시고는 희희낙락해 수염을 내리 쓴다.

그 시대에 살았던 제주사람들은 지금도 그 가문잔치의 진수(眞髓)를 잊지 못하고 있다. 잔치는 가문의 경사라 모두 한 몫 하려고 자원해 나선다.

중요 임사(任使)는 고깃도감 밑에 조력하는 짝 도감. 이 짝 도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명 도감 감이라 도감과 호흡이 맞는 문하생이어야 한다. 청객은 다정다감한 호감형으로 혼주의 사돈에 팔촌까지 인연관계를 다 알고 있어야 되고, 게다가 낮선 손님이 오면 혼주 눈치를 알아채야 한다.

하객이 올레 목에 들어서는데 빈방이 없을 때는 무턱대고 "손님 들어감수다(갑니다)"하는 통에 방안에 있던 하객들은 알아채 말없이 나와버린다. 겸양의 미덕이었다. 부수적으로 목청도 남달리 듣기 좋아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고깃반(盤)이란 나무쟁반에 돼지고기 석점과 가운데 수외(순대) 한 점 얹혀 놓는 것을 말한다. 이 고기반은 사람 당 한 개만을 줘야하는 엄격한 배분원칙을 지켜야 함으로 인정 사정 없는 원칙주의자라야 한다. 한번 받아먹은 사람은 기억해 두었다 아무리 떼써봐도 통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불통형이라야 토종돼지 한 마리로 잔치를 치를 수 있었다.

도감소에서 나오는 고깃반도 살핀반(어르신이니 눈여겨 살펴라는 뜻), 보통반, 오반(애들에게 주는 반) 세 등급으로 차등화 돼 청객 호명을 들으면서 도감소에서 나온다. 살핀반은 석점 외에 갈리(갈비살) 한 개를 더 얹은 것인데 가문의 할아버지나 출가한 고모 할머니까지 갈비 놓은 반을 받게된다.

또 여기에도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뼈 붙은 갈비는 돼지머리에 한정돼 있는 수라 어른들 가운데도 연상 어른에게 뼈 없는 갈비살은 이외 어른들에게 드린다. 이 갈비 얹은 반을 받으면 "나 이 반을 받게 됐느냐. 고맙다. 잘 먹겠다" 등 고마운 답례가 오가는 것을 보며 애들도 어른 공경하는 맘을 일깨우는 산 교육현장이 된다.

오반에는 부스러기 고기와 내장을 놔 질 양적으로 차등이 너무 심해 애들이 내색하는 것을 보고 어른은 제 몫을 손자에게 밀려주는 내리사랑.

어려운 시대에도 술은 잔치에 빠질 수 없는 동반식품이라 몇 달 전부터 가양주(家釀酒)를 담아 고소리 소주를 걸러낸다. 동네 술꾼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접근해 공술 먹고 만다. 한 허벅도 안되는 소량의 술을 가지고 많은 하객들에게 한잔 술을 드리려니 필연코 주감(酒監)을 두게 됐다.

주감은 낭간에 술 허벅을 놔 술잔 돌리는 애 둘을 둔다. 술 먹는 사람에게는 친분 여하를 불문하고 석잔 들이 한잔으로 끝내는 것이 철칙으로 돼 있었다. 술꾼들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으니 아예 올레 목에 서 있다가 술 못 먹는 사람과 동행해 그 분 몫까지 챙겨먹곤 갈지자 걸음으로 헤매댄다. 으레 있을 뻔한 일이라며 잔치 집에 이런 추태가 없으면 "소문난 잔치에 별 볼일 없다"는 평판을 한다.

혼주는 수시로 술 허벅을 흔들어보며 주감에게 재잔(再盞)해 주도록 부탁한다. 하루종일 재 자리를 지키는 파수꾼은 주감 뿐이었다. 그래서 주감 자리에는 옹고집 불통형을 앉혀놔야 부정 유출을 단절할 수 있었다.

출반기 담당자도 있었다. 출반기란 한 마을 안에 거주하고 있는 연로한 어르신들과 상식(上食)하고 있는 집에 고깃반 하나를 보내 드리려고 올레 차례로 기명한 연기명 문서이다. 잔치와 대 소기 때 어르신들을 공겨하는 미풍양속으로 내려오다 1970년대에 들어 없어졌다. 출반기 담당자는 문 도에 서 있다가 그 집 가족이 오면 그 편에 보낸다. 이렇게 체크하다 가족편이 없으면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고깃반을 드리는 미덕은 경로사상이 발로인 것이다.

당시 부조문화는 어떠했을까. 부조는 외방손님이나 비농가 사람들은 돈 봉투 부조 위주이고, 이 외는 모두가 쌀 부조였다. 사촌까지는 곤쌀 한 말, 팔촌까지는 곤쌀 닷 되. 이외는 모두 보리쌀 닷 되, 고운대 구덕이나 훌 보른 구덕에 놔서 온다.

이러니 쌀 받는 여자 분은 한때 눈코 들새 없이 바빠진다. 빈 기물로 보내지 않고 통보리 잔치 밥 한 사발과 반 하나를 넣어 드린다. 받은 반 고기 석점을 다 먹지 않고 애들 생각해서 받아 가는 모정. 애들은 올레 목에 기다리다 오랜만에 팟든 통보리 밥과 돼지고기 맛을 본다.

한번 잔치하고 나면 먹은 만큼 나온다고 했다. 돼지는 시장유통도 없어 어차피 가호마다 통시에서 사육해 한 두 마리 더 마련하는데 여간 어려웠다. 그래서 자녀 혼기에 들면 "쌀 열 말에 돼지 한 마리" 잔치계(契)를 조직하여 상부상조 해 왔다. 또 돼지를 키워 팔지 않고 꿔 주었다 자기 잔치에 받는 비축제도 있었다. 이런 일은 형제지간에도 부조 조로 이루어져 우의가 더욱 돈독해졌다.

잔치 끝내고 나면 으레 먹지 못한 구숭은 있기 마련이었다. 도감이 잔치를 좌지우지해 왔다. 칼자루 잡았다고 마구 써는 것이 아니었다. 확보된 양과 소비자 수를 고려해 고기 점 크기를 정한다. 이 자리에는 혼주 입회 하에 견본 셋을 내놔 어느 것으로 할까 상의한다. 욕심이야 상급을 택하지만 부족하면 충당할 방편이 없기 때문에 도감에게 위임하고 만다. 손님 발자국 소리만으로 인원수를 추산한다는 명 도감의 감지력은 오랜 경륜에서 얻어진 것이다.

고기는 부위마다 질이 다르기 때문에 고루 섞어가며 반 노는 도감의 예지는 우리들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잔치는 배불리 먹는 잔치가 아니라 이젠 정의(情誼)가 넘쳐나는 잔치가 돼야 할 것이다. 강정마을 잔치 푸지다는 말은 이젠 옛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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