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제가 한 가지 물어볼께요. 내가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길을 물어본다. 나한테가 아니라 내 옆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데 괜히 내가 멈춰선다. 어떻게 가르쳐주나 하면서 그 옆에서 얼쩡거려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낄낄대며 웃는다.
“경험자, 손들어 보세요”
열에 여덟아홉이 손을 든다.

“한 가지 더.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 저기서 누군가가 그 버스를 타려고 뛰어온다. 그 때, 그 사람이 버스를 타나 못타나 지켜보다가 버스에 오르면 ‘어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또 웃음이 터진다.
“손들어 보세요”
역시 열에 여덟 아홉.

“이거 보세요. 이래도 우리가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존재일까요?”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하는 요즘, 나는 강연장에 가면 이것부터 묻는다. 왜냐하면 세상을 핑계대며 우리 스스로 각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딸부터가 남의 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을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세련됨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조용히 글을 좀 쓸까 하여 중산간의 어느 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오랫동안 비워둔 시골집이라 벌레들이 많았다. 살충제를 쓰고 싶지는 않아서 구충제로 쓰인다는 비자열매를 구석구석에 두면 해충을 퇴치할 수 있겠다 싶어 비자열매를 주우러 갔다.
 
“떨어진 비자 열매 좀 주워갈께요, 벌레가 나와서...”
“그럼, 달려있는 성한 것을 따가세요. 떨어진 것 깨지고 상했을 텐데”

아니라고 사양하고 열심히 열매를 줍는데 집주인 아저씨가 물었다.

“애들은 없어요?”
“있어요”
“몇이요?”
“딸 둘이요”
“같이 왔어요?”
“아뇨, 큰애는 서울에 작은 애는 서귀포에..., 비자가 많이 떨어졌네요, 저절로 떨어지나요?”
“그럼, 여기 혼자 와 있는거군요”

비자나무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려 해도 아저씨는 계속 동문서답이셨다. 음, 이것이 이른바 제주사람들의 호구조사 대화라는 거구나. 제주사람들은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고 말들을 옮기기 때문에 도무지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던 터다.
 
비자나무는 상당히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창틀에 바글거리던 개미가 한 마리도 없이 사라졌다. 바퀴벌레가 나온 싱크대 밑이랑 신발 벗는 곳에도 비자를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전날 언제든 주워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터라 주인과 마주치지 않을 이른 아침 비자를 주우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셨다. 어제 보목에 가서 자리를 사왔다며, 그래서 ‘어제 집에 없었다’며 한사코 들어와 먹고 가라는 바람에 방까지 들어갔다.

식탁에 앉자, 아저씨는 당신네 가족상황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어제 내 말에 대한 화답 같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 이야기까지. 이에 비하면 어제 나의 답은 너무 단답형, 성의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새롭게 나의 호구조사를 시작하시는 바람에 약간의 성의를 더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혼자 와 있는 거군요’ 그 말을 할 때 아저씨는 나를 돌봐야할 독거 이웃으로 마음에 적어두신 듯했다.
 
이 낯선 동네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인가. 본척 만척 하기 보다 물어봐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사람이라면 만났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제주 친구들은 내게 말할 지도 모른다. ‘두고보자, 언제까지 그게 고마울지. 네가 뒷담화를 아직 제대로 당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나는 제주사람들의 관심이 정으로 느껴진다. 생판 남인데도 길을 가르쳐주고 싶고 버스에 탔으면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옆집에 누가 사는지, 옆집에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르는 세상이 아닌가.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도 ‘물어보는 관심’이 소중하고 귀하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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