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촌로의 되돌앙본 인생]윤세민/교육자

관광객들은 “곧 제주 국제공항에 착륙 하겠습니다” 기내방송에 창가를 통해 제주 섬을 내다본다. 산야 군데군데에 돌담이 둘러 있는 무덤이 보인다. 오름 기슭에는 방위를 달리해 운집된 곳도 있는가 하면 경작지 한가운데도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선인들이 남겨놓은 매장 문화이다.

선인들은 모태가 건강해야 태어나서도 발육성장하고, 명당 집터를 잡아 살면 자손들이 잘 돼 간다. 죽어서도 양지바른 명당에 묻히면 자손들이 번창해 명문가가 된다며 세 가지 터를 중시해 왔다.

그래서 권세가는 육지지방에서 명 지관을 초청해 유숙하면서 명당자리를 찾으려고 제주 산야를 누벼 다녔다. 산 터도 망자가 생전에 적선해 둬야 명당자리에 영면한다며 지관은 쇠를 놔본다. 당시 풍수설에 의한 장묘문화이었다.

현실은 토지잠식 자연환경파괴 등 많은 문제점이 도출되고 있다. 그래서 장묘문화가 달라지고 있으나 아직도 매장문화는 존속돼 공동묘지와 가족묘지에 새로 단장된 봉분을 볼 수 있으나 산담은 볼 수 없다.

예전에 한 사람을 안장하는데 장지가 멀면 멀수록 상여를 메고 가는 인력이 필요해 많은 주민들이 참여해 왔다. 당일 봉분도 쌓고 산담도 조성하게 되니 작업량이 많았다. 그래서 역할 분담이 관행으로 돼 상주로부터 여 복친까지 합심해서 봉분과 산담을 마쳤다. 봉분 쌓는 것은 복친들. 진토 흙은 마을 상두들이 파서 맹뎅이로 운반해오기. 이래서 봉분이 완성된다.

봉분 크기에는 망자의 권위와 자손들이 과시에서 제각각 달랐다. 제주의 봉분은 육지와 모양새가 다르다. 육지 봉분은 밥그릇을 엎어 논 원형모양인데 제주 봉분은 전면은 둥근모양인데 후미에 갈수록 길게 뽑아 내려간 것이 특이하다. 마치 표주박 모양새다.

문헌에 의하면 인간은 자궁에서 태어나 도로 자궁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자궁모양새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벌초하는 젊은 자손들은 옛 어른들의 산담을 왜 만들었을까 의문을 갖는다.

1960년대까지도 봄철에는 목장 산야에 방화를 놨다. 가시덤불과 억새를 태워 초지 조성과 진두기 방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묘소가 불 타버릴까봐 또 우마를 방목하던 시대라 봉분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어 산담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산담 없는 묘는 방화 불에 검게 타버려 자손들은 혼비백산 했다며 초혼제를 지냈다. 소는 거침없이 사나운 뿔로 훼손해버려 반 토막 봉분을 보면서 불효막심해 날을 봐 축고 드리고 보수하게 된다. 이제는 방화가 금지되고 우마 방목이 없으니 산담이 불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1944년 세계 2차대전 무렵 일본군은 녹하지 오름 근처에 제주 산담과 봉분 같이 위장해 참호를 구축했다는 당시 노무자로 고역당했던 분의 증언이다.

산담은 얼른 보기에는 장방형 같이 보이지만 사다리형이다. 산담 기본 설계를 도맡아 하는 분이 동네마다 있었다. 장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양팔 너비는 줄자와 다름없고 거리는 발걸음으로 잡아 초석을 논다. 그래도 정확했다.

돌담을 모아 운반해 오는것이 상두 몫이라 사방에 흩어져있는 잠석을 누구의 착상인지 모두가 교모하게 만든 푸지게(짚으로 만든 간이 등짐 운반 기구)를 메고 날았다.

산담 쌓는 것은 돌 일에 노련한 분들이 맡는다. 상벽 돌담이라 그 사이를 메우는 잔돌은 여 복친들이 주워 모아 속을 채운다. 이 분담 역할은 관행이 돼 일사불란하게 합심해 산담은 완성 돼 간다.

산담 앞 양쪽 모서리 돌담이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귓돌을 세운다. 이 돌은 장사라도 거뜬히 들을 수 없는 장방형 큰 돌이다.

여기에도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특이한 관행이 있었다. 망인의 사위가 갖다 세우게 된 것이다. 돌담을 나르던 상두들은 귓돌을 마련했다며 사위를 부른다. 이 지방의 관행을 사전에 알아차린 분은 술과 돼지고기 안주를 들고 가 “어찌 이 약골이 들고 갈 수 있겠습니까”한다. 그러면 누가 나서 “우리 술 두 되로 맡아 줍주” 일도 마무리 돼가고 한잔 술이 요긴한때 꾸며낸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이런 관행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먼 외방사위는 그 귓돌을 지고가려는 것을 보며 술 한 되에 인색하다며 놀림 당했다.

산담에는 신문을 내어둔다. 남자는 좌, 여자는 우쪽 합묘인 경우에는 앞에 큰 디딤돌은 논다. 지제하고 나면 신문을 돌로 막아 버린다.

대 역사를 마치고 나면 시장기가나 초졸해질 때 쌀 고단이라 돌레 떡과 술로 피력 음식을 받게 된다. 이제 두 참도 더 되는 길을 걸어서 내려오게 된다.

이 과정에도 고달픈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상야릇한 이벤트가 있었다. 사전에 몇 사람들이 극비에 모의하여 상여 틀목을 엮어 가마 비슷한 구조물도 만들고 풀 잎새로 왕관과 긴 담배 통 대도 만들어 둔다.

어떤 사람을 사또로 선발하느냐 이미 향약 마냥 정해 있었다. 논밭만 사는 구두쇠, 공술 좋아하는 자. 돈은 있으나 술 한잔 살 줄 모르는 외톨이었다. 피력음식을 마쳐 일어설 무렵에 지목해둔 사람 앞에 당돌하게 엎으려 “오늘 사또로 모시겠습니다” 풀잎 새 왕관을 내민다. 그러면 기꺼이 받아 가마에 올라앉는 사람은 공동체 일원 자격이 부여되고 기피해 도망치는 사람은 왕따로 쳐버린다.

가마에 올라앉은 사또는 기고만장한 위풍을 떨치며 동네 거리로 들어온다. 사또는 발 빠른 사람을 시켜 술과 안주 감을 준비해 두도록 한다. 집 마당에 하마한다. 상두로 갔던 분들은 한잔 술을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잊고 만다.

소통과 화합의 장이 돼 옹졸했던 사람도 신바람이 난다. 선인들은 이렇게 희로애락을 즐기며 달리며 살아왔다. 요즘은 장례를 돈으로 치르지만 예전에는 상부상조의 미덕에서 정감이 어울려져 큰일을 치른 선인들의 예지에 감복해진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