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민 / 원로교육지. 수필가

지천으로 물 많은 강정마을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백중날 물맞이 연례축제가 있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농경문화의 축제로 삶의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려 선인들의 애환과 훈기가 솟구치는 장으로 전승돼 왔다.

농경시대 강정마을 농사는 벼농사 일색이라 백중절기에는 논일을 대충 끝내어 추수를 앞둬 재충전할 시기라 하루 일을 미루고 물가로 모여든다. 아끈 내, 큰 내 변에는 은어 낚시꾼들과 소왕 물에 가지 못한 사람들만이 모여 다양한 물놀이로 축제장이 된다. 여기에도 민속 오일장을 방불케 하는 먹거리 장터가 열린다. 가시물, 큰 강정물, 동이물, 꿩 말물 등 소 하천에는 수심이 얕아 노약자나 애들이 물맞이 장소로는 최적지라 가족단위로 모여 낮 한때를 보낸다. 그저 먹거리는 개역(미숫가루) 우영팟에 심어두었던 사탕수수 몇 자루가 고작이고 어른들은 자리회 특미식 이었다. 어머니들은 부스럼을 찬 물로 씻어주며 ‘곤 애기 곤물 날아(고운 애기를 위해 맑은 샘물 솟아다오)’ 입담도 한다. 선인들은 물을 항상 신성시해 왔다. 물 코에서는 기저귀 빨래도 하지 않았다. 후손들이 살아가는데 물은 생명수요 약수라는 일념에서 살아 오셨기에 일급수가 근간까지 도처에 흐르고 있었다.

진짜 백중 물맞이 축제는 소왕물 상류 잔디밭에서 열리는 민속 먹거리 장터였다. 용돈 몇 푼이라도 손에 줘야 기고만장해 이 축제에 갈 수 있었다. 이 축제를 보고 오지 않으면 기십이 죽어 멋들과 말 참여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또래끼리 ‘백중 물맞이 용돈 있느냐’고 인사말처럼 나누었다. 소먹이 장남들도 이날만큼은 1원 지폐 한 장 주며 놀고 오라는 특전을 베푼다. 그래서 백중날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다. 백중날이 다가오면 입 소문이 동네에 떠돈다. 떡국장사로 나가는 집의 절구통 소리가 들리면 애들은 울담 구멍으로 쏘아 보다 그만 내색하고 만다. 김 서방 집에서는 오랫동안 부뚜막 녹슨 풀떡 쇠판도 제철을 만나 돼지기름 세례로 치장하는 고소한 냄새가 동네 길거리로 풍겨 누구네는 풀떡 장사 가는 구나 알아차린다. 토속 먹거리 상판은 소왕물 잔디밭에 성시를 이루어 오랜만에 이수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장소가 된다. 누가 기별했는지 먼 곳에서 도배 잡화상들도 모여들어 민속 오일장을 방불케 했다. 살 물건 없어도 재미로 만져보는 구경꾼들로 잡화상 영감이 신경을 곤두세워 야단쳐 댄다.

맛자랑, 솜씨자랑 모두가 신토불이 식품이라 별미식 이었다. 떡국, 돔베고기는 당연 으뜸이라 애들은 눈요기일 뿐 그래도 맘은 흡족했다. 빙떡, 풀떡, 개역, 우미 삶은 것, 쉰다리, 구감삶은것, 눈갈사탕, 토종 광 복숭아, 사탕수수, 모리상외 떡 등 온갖 먹거리가 나와 먹는 재미, 구경 재미로 돌아 다니다보면 한 나절은 지나버린다. 풀떡 사 먹고 나면 한 여름 염열도 저절로 녹아내려 구리터분한 갈중이를 홀렁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냉천에 들어앉으면 염천 더위로 빨갛게 부어 오른 콧등도 이내 냉각되면서 한 더위를 잊고 만다. 대낮 더위도 한 풀 꺾이고 노곤했던 몸체에 새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잔디밭 노송그늘로 모여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강정마을 대 법환마을 씨름판을 보기 위해서다. 팀장도 없이 소년 패들로 시작해 점차 상위 체급별로 올라가는 세 사람 이어 눕히기 경기방법이라 심판 부심 없이 진행되나 순조롭게 진행됐다. 최후에 벌어지는 두 마을 장사 대결전이 전초전이라 승패에는 무관심이다. 마을 대항전은 마을의 명예와 사활을 건 한 판 승부라 소왕 물가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강정마을 장사는 1928년생 강순호(姜淳昊)씨였다. 조실부모 할머니 슬하에서 살아오면서 영양식 한 번 배불리 먹지 못하고 어디서 힘이 솟는지 태연자약한 모습을 항시 우러러 봤다. 상대편 마을장사도 유도 몇 단이라고 아침부터 기고만장해 소왕물가를 활보해 다니며 우리편을 잔뜩 기죽이고 만다. 질세라 우리들은 혹시나 힘에 몰릴까 닭 머리 개나 먹었다며 헛소문 퍼뜨리는데 한 몫 한다. 결전의 씨름판을 지켜보기 위해 노송나무 가지마다 응원단이 까마귀 떼 같이 올라앉아 자리 잡고 있다. 두 장사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순식간에 변모해 버렸다. 단단한 허벅다리 힘살은 얽히고 엉켜 철갑 같고, 솟구쳐 내뿜는 으름장은 황소마냥 토해냈다. ‘응’하는 단 숨 기합에 상대방 장사를 뽑아 올렸을 때의 함성은 소왕물 줄기도 놀래 엉거주춤 했을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아래 농사일로 쌓인 스트레스는 단숨에 녹아내려 모두가 동서마을로 헤어진다. 제주 4‧3에 이어 6‧25 한국전쟁을 겪다보니 이 축제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소왕물 길목에는 잡가시 덩굴로 뒤덮여 분간할 수 없고 그 훈기는 모진 풍상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노도와 같은 그 함성을 녹취해 둔 노송도 밑뿌리 흔적 없이 사라져 찾는 이의 마음이 황막해진 뿐이다. 잔디밭 광장만이라도 보존돼 왔으면 옛 정취 찾아 나서건만 터전마저 개인 소유로 돼 향토문화 재현은 꿈 속 에서나 그려질 것인가! 그래도 미련만은 버릴 수 없어 백중날이면 물가에 모여 앉아 시원한 자리회 국물에 식은 보리밥을 말아먹으며 여생을 정점으로 꽃피워 오던 촌샌님들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 그 자리에 영문 모른 왜가리 한 쌍이 서성거린다. 소왕물 어느 한 구석에 유래비 한 조각이라도 세워 향토문화의 자취를 기려보자. 그리고 스물 둘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강순호 장사의 승전고를 이 곳에 기리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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