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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징용과 원폭윤세민/원로교육자(수필가)
윤세민 | 승인 2015.08.02 12:15

지난 2007년경에 늦게나마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 피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피해신고를 접수한 일이 있었다. 생존해 있는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당시의 상황을 적어 내려니 울분과 통한으로 손목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는 젊은이는 역사의 음지로 내몰렸던 개개인의 피해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상처에 또 상처에 덧입혀지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가지 말면 될 것을 왜 갔을까? 제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국방의무도 의사에 반한다며 뻗대는 판인데…. 당시 어른들의 무력함을 나무람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권을 빼앗긴 백성인데 총 칼 잡은 간악한 사람 앞에 어찌하란 말인가. 당시 상황은 이렇다. 태평양전쟁이 나면서 홋카이도(北海島), 가라후토(화태, 지금의 사할린) 석탄탄광에 노무자로, 남양군도에는 허울 좋은 군속으로, 전쟁 막바지에는 초등학교 갓 나오는 학생들에게 일하며 공부하는 곳이라 달래가며 진해 조병창에서 뽑아갔다. 인원을 채우느라 애먹고 욕본 사람은 면사무소 노무(일명 공출)담당 직원과 마을 이장들이었다. 보내고 난 가족들은 그 이상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디에 말 한마디 못해 냉가슴 응어리를 움켜쥐고 하루가 멀다고 살아왔다. 대식 때마다 먹는 것이 성에 가지 않는다며 국밥 한 그릇 떠놔 배고픔을 함께하던 어머님들…

일은 여기에 끝내지 않았다. 기쁨의 8.15조국 광복을 맞으면서 살아서 귀국한 젊은이를 만나니 마을 노옹들은 뭐라 위로해서 좋을는지 뵈올 면목이 없다며 물러서고 말았다. 이런 비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인정 많고 활달한 외삼촌은 마을에 배정된 인원을 못 채워 고민하는 ○○님의 애꿎은 꼴을 보고 동정도 부조라 자원하고 나섰다. 시코쿠(四國)에 갔다는 소식이 전해 왔을 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소식이 캄캄한 때었지만 미군이 일본 본토로 침공해 오는 감은 잡혔다. 대 낮에 보라는 듯 상공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미군 정찰기를 보고도 고사포 한방 쏘지 못하는 열세를 보면서 패운이 임박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8.15 정오 방송을 듣고는 이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어머님께 전해 드리려고 먼 자갈길을 헐레벌떡 달려왔다. “일본이 항복으로 전쟁은 끝냈습니다.” 듣는 순간 손뼉 치며 덩실대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그렇게 장담하던 일본이 원폭 두 발에 항복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한 보름쯤 지났을까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무시무시한 폭탄이 투하돼 도시가 순식간에 잿더미 돼 버렸다고 수군거리더니 사실이었다. 이때부터는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사망통지 한 장 날아올 것만 같아 까악 까악 짖어대는 까마귀만 보면 날려 보내곤 했다. 얼마나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랬을까. 종무소식으로 부모님 가슴에 파묻혀 끝내 불효자가 되는 것이 아닌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정지에 졸래졸래 모여앉아 저녁대식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누님 나 왔수다.” 오랜만에 외삼촌의 목소리를 들으니 화닥닥 뛰어 나갔다.

악랄한 십장의 채찍질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 돌아온 기개가 도도하게 보였다. 굴 안에서 잠수함 건조작업을 했기에 화를 면했다며 애석한 심정을 내비쳤다. 죽은 고기떼가 세토나이카이 해협 파도에 떠밀려 오는 것을 봐 그때야 원폭의 위력을 실감했다며 그 참상을 더 잇지 못하고 끝내고 말았다. 들을수록 전쟁의 참혹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로부터 50년 후 말로만 듣던 히로시마 원폭 박물관을 찾았다. 삼촌이 그때 허풍을 마구 친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엿가락같이 꼬아버린 철탑기둥. 까맣게 타버린 도시락 밥알을 보면서 원자폭탄을 만든 인간의 포악성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침략 당했던 동남아 각국에서는 이미 전쟁유적 박물관을 세워 피맺힌 유품과 자료가 찾는 이들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타이랜드는 2차 세계대전 참전국은 아니었지만 일본군이 전략지구로 이용된 곳인데도 일본군의 전투장비가 고스란히 전시돼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지붕은 야자수 잎으로 엮어 덮어 빗물을 막고 사방 벽은 대나무 발로 둘러 방풍하고 있었다. 전시대는 통나무 평상형으로 조립돼 건어장 시설과 비슷했다. 비바람 없는 나라에 걸 맞는 단조로운 꾸밈이라 통풍이 잘 돼 오손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초라한 움막집을 처음 봤다. 그래도 전쟁박물관의 생명은 잃지 않고 일본군의 만행과 전쟁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고발 하고 있다.

박물관 하면 우리는 선입감이 우람한 대리석 건물에 내부에는 견고한 유리 진열대에 조명시설을 연상할 것이다. 멀리 내다보지 말고 그리고 난제로 여겨 미루지 말자. 수려한 제주의 산과 오름은 그네들의 할퀴고 간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뭣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되묻지 말자. 이러한 현실에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면 역사의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70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제 식민 통치의 치욕과 고통의 역사는 곱씹고 또 곱씹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윤세민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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