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세 민 / 원로교육자. 수필가

농경시대 강정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래서 “일강정”이라 불렀던 것 같다. 물이 도처에 솟아나 그 물로 논밭을 만들어 쌀 소출이 됐으니 풍요한 농촌이었다. 토질이 비옥해 보리농사도 잘될뿐더러 미질이 좋아 오일장에서 강정 보리쌀이라면 가격에 차등이 있어도 구매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쌀 한 두 말 짊어져 가면 생필품을 사들고 왔다. 그래서 나록과 보리는 환금 작물이었다. 가호마다 전답이 넓어 많은 미곡을 수확한 것은 아니다. 타지방에서 생산되지 않은 쌀이니 소량이라도 귀하게 여겨진 것이다. 밥 한 끼 같이 먹고 가라고 할 정도면 으레 쌀밥을 내놨으니 그리 쌀 걱정은 덜한 편이다. 섣달 그믐이 다가오면 큰 아들네 집에서는 명절준비로 바빠 섣달 그믐 아침도 잘 챙기지 못한다. 이에 비해 작은 아들 집은 한가한 편이다.

섣달 그믐날 아침은 한해를 무사히 보내는 기쁨에서 큰맘 먹어 되박새기로 헤아려 보지 않고 듬뿍 담아 무쇠 솥 밥을 짓는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곤밥 냄새에 온 식구가 모여든다. 곤밥 만 이라도 단숨에 먹어 치우겠는데 돼지고기 국까지 동반했으니 집안 송년파티와 다름없었다. 이런 성찬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들은 대여섯이 모여 제찬계(祭粲契)를 만들어 기금을 적립해 두었다가 섣달 그믐에는 돼지 추렴을 한다. 형제는 한솥밥을 먹고 자란 식구인 동시에 남이 되는 시초지간이다. 우리만 먹을 수 있겠는가. 형님 집에는 명절준비로 아침도 변변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큰 낭푼이에 밥, 국통을 들고 큰집에 갖다 드린다. 이 풍습이 무슨 가가례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지간 맺어진 우애에서 밥 한 끼 나누어 먹을 뿐이다. 이런 미담이 동네에 번지면서 다른 집안에까지 파급돼 갔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큰집에서는 작은 집에서 그믐 밥이 보내오겠지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한 끼 같이 먹는데서 우애는 더욱 돈독해지듯이 찾아온 손님에게는 “밥 한술 떠보고 가라”는 말을 예사로 하던 인사말이었다. 한 끼 같이 먹는데서 일심동체가 된다는 생활 철학을 체득해 온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식문화가 질적으로 다양해지면서 먹음 위주 문화는 소멸돼 이런 풍습도 동반 소실되고 말았다.

다른 마을에 없는 새 나록 밥(햅쌀밥) 나누기 풍습이 있었다. 벼농사에서 추수는 들판 황금을 걷어드리는 기쁨이라 맘이 넉넉해진다. 수확된 벼를 용도별로 분할하다보면 여유 잔량은ㅇ 얼마 되지 않는다. 우선 제미(祭米)를 큰 황 그릇에 봉한다. 다음은 큰일 돌아보는 부조용, 수확한 벼를 용도별로 분할해 독그릇에 넣어 곱팡에 보관한다. 벼 원곡 데로 두었다가 필요할 때 쌀로 정미한다. 그 이유는 쌀로 두면 쌀 되 박이 자주 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냥하며 살아온 선인들의 생활모습이다. 내종에야 어찌 되건 간에 늦으면 기가 죽는다며 부랴부랴 남 방아에서 정미해 한말들이 무쇠 솥 밥을 짓는다. 남푼이 밥그릇을 동네에 돌린다. 받아먹고 도로 밥 보내지 않으면 가난뱅이 구두쇠 낙인 찍힐까봐 문서 없는 규약이었다. 먹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어보고 맛이 어떤가, 맛이 좋으면 그 벼 품종이 뭔가, 소출은 얼마나 나왔느냐 물어본다. 시식을 통해 벼 품평회가 이루어졌다. 당시 비료나 농약이 없는 때라 도열병 발생하면 방제는 단 한 가지 기계 방에서 나오는 폐유를 물코에 뿌려 번지면 긴 장대로 벼잎을 쓸어 내려 나방을 죽이는 원시적인 방제방법이었다. 그러다 태풍이 불면 벼는 해수 피해로 빨갛게 말라버린다. 걷어드려야 내 것이지 그 이전에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병해충에 강한 품종,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알맹이가 떨어지지 않은 품종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새 나록밥 돌려 나누어 먹는 것은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농사정보를 얻는 일거양득이었다.

다른 지방에도 있는 풍습이지만 집안에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삼폰 형제간에는 순번을 정해 집에 오도록 해 밥 먹는다. 이러므로 가족 구조와 올레를 알게 된다. 이때 먹는 밥을 새 각시 밥이라고 했다. 출산을 알리는 애기밥도 있었다.


큰일에 강정마을에 와 떡을 먹어보고 맛있다고 한다. 쌀 위주 떡 음식이 특이해 절변, 솔변 맛이 다르다. 쌀 질이 좋은 뿐더러 만드는 과정도 다르다. 먼저 쌀가루를 만든다. 벌문 집안에는 분량이 많으니 동네 공동 연자방아에서 인력으로 맷돌을 돌려 가루를 만든다. 소량일 때는 집 방아에서 “이어도 하라” 방아 노래 부르면서 짓는다. 이렇게 정제된 떡가루는 정지 칸에서 시루에 넣어 무쇠 솥에 얹혀 온기 순환을 조절해 김이 고루 돌도록 닫은 문짝도 함부로 열지 못하게 출입을 통제해 왔다. 부정 타면 떡시루도 알아챈다며 근신해 왔다. 다 익혀 낸 시루떡은 상방 마루에서 절구통에 넣어 방아로 찧는다. 종부는 이런 과정을 손놀림으로 조정하며 새 며느리들에게 일러준다. 한솥밥 가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즉 가문의 법도와 예의범절이 스스로 익혀져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다.

손녀 뻘 연하자 에게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골물집 며느리(화순지경 마을), 난드르방(대평마을), 창구네방(창천마을), 도래물방(회수마을) 친정집 옛 마을 지명이 택호와 칭호가 돼 버렸다. 옛 선인들이 불러오던 택호를 들으면 지금도 다정다감해진다. 가족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음 뿐더러 분위기는 전염된다고 한다. 가문의 전통과 법도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오래 된 가문의 할머니들이 손때가 묻고 애환이 담겨있는 떡 기구(솔변․ 정변 본, 떡판방아, 대나무 차롱)들이 숭모관에 소장돼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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