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 / 여성학자

우리가 그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경품추첨이 막  시작되는 중이었다. 혹시 빈자리가 있나 싶어 객석 사이를 누빌 때 누군가가 손드는 사람들에게 작은 종이조각을 나줘주고 있었는데, 그게 경품권이었음을 그제사 깨달으니 어찌나 애석한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으리. 서귀포 시장, 표선면장, 표선이장, 도의원 등등이 경품추첨자들이었다.  422번! 시장이 선물을 전해주고 내려갔다.

224번! 다음번호는 시장이 뽑은 번호를 뒤집은 것이었다. 어? 번호조합이 재밌네. 사회자까지 번호를 재차 불러주며 신기해 했다. 공교롭게도 그 번호의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5,4,3,2,1 무효!’ 와아아 환성이 해변가에 울려퍼졌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이런 집단 행동도 이때만큼은 애교가 된다. 999번! 우왕, 나도 경품추첨을 적잖이 보았고 경품행사 진행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999번을 듣긴 처음이었다. 9세개도 신기했지만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 천명이 넘는다는 것에 은근히 놀랐다.  다음 번호는 700번! 999번 다음에 777 번이 뽑혔다면 오히려 시시할 뻔 했다. 행운의 숫자 7에 딱 떨어지는 백이 더해진 게 흥미진진했다.  사회자는 센스있게도 경품을 타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었다. 경남 양산, 경기도 안양, 충북 청주, 그들이 주소를 말할 때마다 객석에서 ‘우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더운 날 멀리서 왔구나, 저런 사람들이 경품을 타니 다행이다, 서운함 대신 축하하는 이심전심, 아까 결번에 환호했던 것과는 정반대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래서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아직도 유효하구나, 마음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그러나 역시 지역주민들 몫도 있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침 다음 경품 추첨자가 추첨함을 뒤적이며 말했다. “이번에는 표선에 사시는 분이 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 마음을 저이한테 알려준 게 누구지? 그러나 표선 사는 사람이 꼭 뽑히리라 기대는 안 했다.  “어디 계십니까? 아, 저기 나오시네요, 표선주민이네요" 사회자는 당첨자가 무대에 이르기도 전에 확신했다. 다갈색 피부, 선탠이 잘되어서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출신이었다. 표선주민, 그중에서도 다문화 가정 주민이었다. 사람들의 박수가 또 터졌다. 그래, 타향으로 시집와서 사는 사람에게 마음 붙힐 위로가 되겠구나, 참 잘되었다 싶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추첨, 결번이 나오면 5,4,3,2,1을 신나게 함께 외치는 던 중에 다시 한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표선주민이 뽑혔는데 이번에도 결혼 이주 여성이 당첨된 것이었다. 아, 이상도 하다. 객석이 약간 술렁였다. 짜고 치는 각본이 있을 리가 없는데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이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은 내게 처음이 아니다. 가장 최근의 경험은 작년에 제주 올레 자원봉사자 땡큐파티 때였다. 그날 모두가 노리는 최고의 경품은 자전거였다. 저걸 타가는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될 분위기가 시작부터 팽만했다. 그런데 경품의 당첨자가 결정되는 순간,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모두들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낸 것이다. 그중에는 당첨자도 안 흘리는 감격의 눈물을 대신 찍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누구였길래? 그는 지난 전국체전 성화봉송을 맡아 21일간 새벽잠을 뿌리치고 그 성스러운 불이 제주를 한바퀴 돌도록 지켜낸 자원봉사자였다. ‘기가 막히도록 정확하게 탈 사람이 타는구나’. 이런 추첨행사를 하면서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사랑의 마음이라 생각한다. 욕심도 따지고 보면 사랑이다. 자기만을 위한 사랑. 그런데 이 사랑이 남까지 포용하는 큰 사랑일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난다.
표선축제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났다는 것은 거기 큰 사랑이 먼저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표선의 인심은 그날 축제에서만이 아니라고 했다. 2008년 3월, 올레4코스가 개장할 때, 그러니까 올레길이 본격적인 빅힛트를 치기 전인 그때에 표선면에서 돼지 몇 마리를 잡아 손님들을 대접한 것이다. 팔아도 팔릴 날에 ‘대접’을 한 것이다. 더구나 예상초월 천명 가까운 손님을 맞게 되자 면내의 음식점 냉장고의 돼지고기까지 급히 사들여 ‘모자라는 서운함’이 없게 마음을 썼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으면서도 가슴이 찌르르, 감동이었다.  표선(表善), 착한 게 표가 나는 동네, 명실상부한 동네, 내년에도 그 축제에 꼭 갈 수 있기를, 보이지 않는 손에  찌르르 행복한 감전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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