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 / 시민기자

표선 인준이 할망네 동박낭은 지서났다. 울타리가 좋은 거주. 거기에 상자리 메났다. 상자리 알아지크냐, 일종의 피서지다. 돔박씨는 털어지민 좀먹엉 고망똘라진다. 낭 아래 땅바닥을 긁으민 나온다. 그걸 호루라기 추룩썼다. 당시 호루라기는 누구나 갖고 싶은 거였다. 운동회 때나 선생님이 부는 호루라기. 무엇인가로 소리를 내고 싶어서 환장했다. 폴지도 않았다. 그러니 살 수도 없었다. 고망똘라진 돔박씨 불민 새소리도 나곡. 좌우지간 소리가 났다.

떨어진 고장을, 또꼬망으로 뽈아 먹었다. 비나 살짝 와나민 떨어진 고장이 무사 겅 달콤해신고이? 꿀이 없어도 향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돔박생이집은 성호형이 잘 만들었다. 대나무와 칼과 송곳만 있으면 문짝 만들었다. 생이집은 생이를 기르는 목적 보다는 잡는 목적이 컸다. 돔박생이를 오래 질룬 사람은 없었다.
 생이 꼬시는 밥은 감저친거 으깬 거, 물, 까끄레기낭 열매였다. 돔박생이는 야성이 강해 오래 못 키웠다. 돔박생이는 첫 포획이 어렵다. 정 못잡으면 꾸던지라도 해서 생이집에 넣고 그 위에 치를 놓으면 쉽게 잡혔다. 잡힌 생이가 날살려도라 날살려도라 허민 구하러 오는데 그때 왔다가 잡혔다. 그땐 그게 고왔다. 돔박생이가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제일 고급은 쥉이치로 돔박생이를 잡는 거였다. 지금과는 달리, 지금은 핸드메이드가 왕이지만 그때는 포는 것이 왕이었다. 철물점서 사는 것이므로 귀했다. 그러니 쥉이치로 생이 잡는 아이가 요샛말로 갑이었다.

돔박낭으로 만든 팽이가 싸움엔 최고였다. 노꼿으로 만든 팽이채로 팽이를 팡팡치민 천하무적이었다. 더욱이 팽이 아래에 총알쯤 박아노민 진짜 왓따였다. 쎈낭이라부난 깎으긴 어려웠다.
누레기 가달은 백미낭이 최고였고 두 번째가 돔박낭이었다. 돔박낭 생이총은 둔했다. 누레기는 처음 듣는 말이다. 백미낭에 빈찍빈찍한 그 무엇이 달리는데 마루 닦는 데 쓰면 좋았다. 버끔 닮은 거였다. 백미낭은 가늘어도 쎄다. 누레기 고무줄을 그러니까 생이총 고무줄을 박는 게 아니고 그냥 백미낭에 묶었다.

가늘므로 못질 할 자리가 없었다. 애기들 손엔 백미낭으로 만든 생이총이 딱 맞는다. 그 당시 고무줄이 귀했는데 어머니 작살 고무줄에 시선이 갔다.

꿈이 돌깍돌깍 하지만 작살 고무줄을 건들었다가는 작살난다. 매 버청 못산다. 훗날 납짝팽이가 나온 후 왕이 되었다. 이것도 포는 것이므로. (송 아무개 1955년 생)

전엔 산에 가서 돔박을 따다 팔았다. 그때는 그거나 해사 돈을 벌 수 있었다. ‘야게기’가 그차지도록 산에서 지고 왔다. 오다가 너무 버치면 돌로 열매를 모사 씨만 챙겼다. 약간이라도 부피와 무게를 줄였다. 쉴 때마다 그 짓을 했다. 날은 어둡고 야게기는 그차지고, 누군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을에 와서 받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지름을 펭에 질엉 놔두민 쥐가 꼬리를 집어넣어 빼 먹었다. 하룻밤에 한 펭을 다 먹어 버리는 수도 있었다. 마개가 시원찮아서 종이나 낭섶으로 막아두민 쥐가 요령껏 열고 먹었다. 그래서 괴에 지름을 보관했다. 돔박지름은 해 묵으민 목 아팡 못 먹는다. 허물에 볼랐다. (할머니 1938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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