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동화작가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새 책 마루리 작업을 제주에서 하고 싶으니 방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때는 마침 삼복더위, 방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구한다해도 작업이 될 리가 없는 폭염이었다.

그래도 작가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법이니 무조건 오라고 했다. 난산리 나의 작업실에 온 후배는 좋아라 했다. 낮은 돌담에 외할머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골집이 너무 '동화적'이라며 작업이 잘 될 거 같은 감이 온다는 것이었다.

뜨거운 양철지붕이 위력을 발휘하는 낮에는 호수로 지붕에 물을 뿌리는 물장난을 하고 해가 지고 나면 달궈진 땅바닥과 분곷이랑 낮달맞이 꽃에 물을 주며 물장난을 했다. 밤에는 후끈대는 방을 피해 수돗가 장독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막걸리도 한 잔, 여름날의 소꿉장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 였더라. 그는 20대, 나는 30대, 나는 방송진행자였고 그는 구성작가 였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 제주 중산간 어느 마을에 나란히 앉아 돌담에 감탄하며 맑은 바람을 나누고 있으니 이 자체가 동화같았다. 이웃집  할망들이 모두 잠든 고요함, 밝은 달빛에 푸른 밤하늘, 우리는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가 쓴 어린왕자 같았다.

그러나 밤은 짧고 낮은 길었다. 지붕위의 물장난은 와랑와랑한 볕아래 5분도 효과가 없었다. 방안에 앉아 있으면 선풍기를 틀어도 머리부터 후끈거리다가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안되겠다, 시원한 한치물회로 보신을 좀 하고 오자, 마침 제주에서 사귄 친한 동생 민이가 '보급품'을 가지고 왔길래 다같이 구좌읍 세화리로 달려갔다.

"우와, 한치가 쫀득쫀득해요, 제주에 왔어도 이런 맛은 처음봐요. 컵라면과 햇반으로 때울 각오하고 왔었는데..."

"그건 제주에 대한 모독이야! 이 기운으로 원고 마무리! 막걸리로 건배하자, 아자, 아자!"

"잠깐"

민이가 스톱을 걸었다.

"건배사가 있어야죠, 청바지!"

응?!

"청!"

"청춘은 "
"바"

"바로"

"지"

"지금"

우화하하하하

이 기분, 이 기운이라면 당장 원고지 100매라도 쓸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쪽빛 염색천처럼 쫙 펼쳐진 넓은 바다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아~ 빨리  가서 원고를 써야하는데....

"청바지!"

민이의 말이 마치 구령인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마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야아아아~~~

파도가 밀려오면 더 소리 질렀다.

"온다, 온다, 뛰어!"
"에이 너무 일찍 뛰어서 물 먹었다"
우화하하하
"겁먹지말고 힘을 빼. 그럼 몸이 둥실 뜬다"
"아, 저거 크다, 커, 힘 빼고 물에 실려!"

우리가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놀았다. 물속의  어른들은 놀지 못하고 아이들만 돌보고 있었다. 수영복도 없이 졸지에 홀딱 젖어버린 몸들, 서걱이는 모래, 끈끈한 짠물, 어찌보면 짜증이 날 상황인데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떠뜨렸다.

"20대에도 못해 본 일을 이제야 해보네. 우린 그때 뭘했지?"

나는 방학이면 아르바이트에 바빴다. 결혼해서는 아이들과 놀러오니 '출장'이었고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는 놀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 지난 일을 말해 뭐해?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라니까"

그래, 맞다! 청바지. 그날 우리가 입은 쳥바지는 몇 벌인지 셀 수도 없다.
서귀포로 이사 온 지 딱 1년, 이 곳에서 나는 지금 청춘이다. 이곳으로 만난 사람들과 청춘이다.  이곳은 놀러온 사람들도 바로 청춘이 된다. 산과 바다와 나무와 돌과 인심좋은 사람들이 나를 푸른 시절 청춘으로 돌려 놓았다. 고마운 모두들에게도 청바지를 선물한다.

"사랑해요 ♥ ♥ ♥"

이렇게 적은 쪽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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