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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에 패한 일본군에 얽힌 비화(秘話)(1)[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윤세민 | 승인 2015.08.25 09:41
   
 

70년 전 그해 8월은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한 여름 더위도 이열치열로 지내는데 그런 겨를 없이 마른나무에 물 짜듯이 백성들을 막 볶아댔다. 지금은 징용, 공출이란 용어는 낯선 용어가 돼 버렸으나 그 때는 한 두 사람만 모여 앉아도 화제는 으레 징용과 공출이었다. 노역이 얼마나 심했기에 그랬을까. 꿩말물 냉탕에 들어가도 노역과 공출의 시름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전율이 감돌아 언제면 시원한 하늬바람이 열망해 왔다.

드디어 원폭광풍은 작열했던 열풍을 단숨에 날려 보내고 말았다. 꽁꽁 묶였던 쇠사슬이 끈기면서 우리들은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8월의 바람은 영 잊을 수 없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 패전이 되자 산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제나라에 귀국 할 때 까지 숙영(宿營)할 곳을 찾아 나섰다. 숙영지 요건은 첫째로 식수원, 다음은 군막을 칠 불모지 땅, 대 도로변이 아니면서도 차량통행이 용이한 곳 그리고 민가마을과 떨어져 있는 곳을 고른 것이다. 이런 요건이 다 갖추어 있는 곳이 도순 초등학교 동쪽 하천 변. 속칭 “소낭머리” 지경이었다.

패전이 되자 일본군은 여러 군데를 답사해 정한 것이지 핍박받아 온 우리가 나서 잡아 준 것도 아니었다. 8.15 이후 삽시간에 하천 변에는 군막이 즐비하게 늘어서 일본 육군부대가 모여 들었다. 녹하지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였다. 지나던 사람들은 소나무에 매어둔 열 마리나 되는 군마(호달매)를 지켜보며 패전의 아픔을 모르고 파리 떼를 쫓느라고 꼬리를 흔들어 대니 얼마나 행복한가.

며칠 전까지도 이 군마용 고급 목초(자굴)를 공출하느라 야단맞으며 우리 백성들은 촐왓을 누벼 다녔다. 이젠 가시 넝쿨도 없어 초근목피를 뜯는구나. 천인공노할 침략자의 죄과를 짐승까지도 톡톡히 받는구나 ---전쟁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토로해 댔다.

우리들이 지켜보는 가우데 일본군 수의사는 군마 목 갈비에 주사기를 꽂았다. 육중한 체구가 순식간에 쓰러진다. 모두 사살하려는 기세가 보였다. 지켜보던 동네 젊은이는 말고삐를 휘어잡고 짐승이 불쌍하니 나에게 팔아 달라며 달려들어 말고삐를 잡았다. 주사기를 잡고 있던 일본군인도 돈에 맘에 쏠린 것이 아니라 애마의 생명이 소중함을 알고 인도해 줬다. 기쁜 맘에 젊은이들은 앞 다투어 말을 몰고 마을에 들어왔다. 돈은 얼마를 건네주었는지 모르나 큰 액수는 아니었다.

말을 몰고 와서도 골치 거리였다. 체구가 크니 마구 칸에 메어둘 수 없고 게다가 식성이 고급화 돼 먹이를 구할 수 없었다. 어렵사리 쌀겨를 구해가며 기르다 동네 연자방아에 시험삼아 메어봤다. 회전만 거듭하다보니 기절해 쓰러져 무용지물이라 이젠 어쩔 수 없이 도살해 말고기 파디 제물이 되었다.

당시 혐오식품으로 금기시 된 말고기를 먹느라고 동네 애들도 동참해서 그런지 그 해는 애들이 고뿔 감기를 모르고 지냈다는 동네 소문이 나돌았다니 헛소문은 아니었다.

어떤 분은 일본 고관이 타던 군마를 매입해 교통수단이 전무한 때라 원거리 학교 출근 시 타고 다녔으니 애들은 겁먹어 기마병 온다며 큰 길을 내어줬다. 웃고 말 옛말이다. 애마를 안락사 시키는 일본군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이해가 된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나니 괴 소문이 나돌았다. 심야에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말귀신이 난다는 등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강정마을 사람들은 야밤에도 버스를 이용해 도순 정류소에서 내려 왕래하는 대로변이라 이 길을 우회할 수는 없었다. 이 소문이 한참동안 파급돼 다음날부터는 구명물길로 코스를 돌려 봤으나 안락사장면을 봐 왔기에 섬뜩한 생각이 들어 지금도 그 곳을 지나가려면 그때 봤던 장면이 떠올라 외딴곳을 보고 지나가던 한 때가 있었다.

▲숙영지 근처에 주민들이 몰려들어 오일장 구경을 방불케 했다.

일본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군량미를 비롯해 부식거리까지 비축해 두었으니 민가에서 구매 조달하던 부식거래가 중단돼도 취사 때만 되면 어김없이 일본 특유의 미소시루 냄새가 바람 타 멀리 풍겨대 건재함을 보여줬다.

당시 생필품이 귀한 때라 비누 한 장, 반합(飯合) 한 개라도 얻어보려고 근처를 배회했다. 어른들의 온갖 수모와 핍박 받아온 지난 일들을 애들은 까맣게 잊고 그곳을 찾아갔으니 지금 회상해보면 민망하고 염치없는 수치한 행동거지이었다.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어른들이 없었으니 후회 막심해 진다. 그래서인지 애들 죽어도 싯게(밤 제사) 안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여름철에 대가족이 모기장 치고 잠 잔 집은 소문 난 집이었다. 이때 일본군이 쓰던 대형(15인용) 모기장 1개를 공짜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떻게 사 왔는지 상방 마루에 쳐 한 여름 온 식구가 자자던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도 그 감도가 지워지지 않는다. 망할 놈 뒤에 재미 보는 꼴이었다. 요즘 나오는 나이론 사 제품이 아니라 마(麻)씰 제품이라 통풍되지 않는 순전 야전용이었다. 그래도 저녁이면 으레 모기장이 유일한 애장품이었다.

종이도 어려운 때라 육군이라고 찍힌 양면지를 무더기로 소각하려는 것을 지켜보던 애들이 달려드는 통에 자식을 두고 온 노병도 학구열에 감동 돼 포대째 주었다.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전장에서 피는 장면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또래는 공책으로 엮어 매 쓰기도 했다. 숙영지에서는 매일 연기가 솟아올랐으니 소각 처분한 물량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내 나이 15세 동네 벗들하고 철수해 버린 숙영지에 또 구경 갔다. 빈 깡통이라도 하나 주워 보려는 심보에서였다. 어른들은 내 창에 버린 큰 가마솥을 찾아내어 끌어 올리는데 여념이 없고 부녀자들도 흙 파인 곳을 맨손으로 파는 등 수색방법이 다양했다. 나도 손톱이 달도록 파다보니 손끝에 예리한 감촉이 닿아 마른 미역 포대라 이웃집 어른에게 구원(?)을 요청해 난생 처음 불로소득의 기쁨을 안았다. 건미역 포대를 둘러매고 온 것을 봐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공짜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저 밭 갈 쇠는 녹하지 진지 군수물자 운반하느라 얼먹어 지금 바싹 마르고 있지 않느냐. 아마 녹하지에 노역 당한 소에게 보상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아닌가. 보양식 보리죽 식재료로 써먹었다. 할죽할죽 먹어대는 소머리를 쓰다듬으며 우이독경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전쟁이 승승장구해 가던 1943년경에는 싱가폴 함락 축하행사가 학교단위로 열렸다. 가장행렬에는 키 큰 학생을 골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영국 수상 처칠 역으로 삼아 포승줄로 묶어 앞 세워 북 치며 초롱등 행진 등 대단했다. 적개심을 심어 후방국민들의 전의를 고취시키자는 악랄한 수법이었다. 어린 학생의 인권을 저버린 처사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 세상에 그런 자태가 있다면 특종 사건이 될 것이다. 무지몽매한 세상에 살아온 우리의 고통이었다. 고무원산지인 싱가폴 함락 기념 고무공을 초등학생들에게 나누어 줘 소각 매몰 처분해 버는 것을 보면서 패전의 말라가 이렇게 참 혹하고 인정머리 머져 저버리는 구나. 전쟁없이 살아 갈 수는 없는지 동심에 사무쳐 고민해 봤다.

윤세민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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