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 / 여성학자

“그럼, 작은 애는? 걔는 거기서 어떻게 지내?” 내가 서귀포로 이사왔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번에 이 질문부터 한다. 자폐성장애가 있는 아이가 ‘그 좁은 섬’에서 할 게 뭐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침에 8시 20분에 집을 나서서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 그러면 다들 깜짝 놀란다. 그리곤 안심한다. ‘할머니가 좀 편해지셨겠다, 너희집 식구들도 자기생활을 할 수 있고’  정말 그렇다. 서귀포에 와서 ‘팔자’가 늘어졌다. 주간보호시설은 육지에도 있지만 거긴 오후 4시 무렵이면 끝난다. 그 이후에는 누군가가 반드시 집에 있어야한다. 어머니가 연로해지시면서 내가 집에 있어야한다는 부담이 점점 커졌다. 야간 강의나 당일치기가 불가한 지방강연, 행사사회는 맡기가 꺼려졌으니 생계에도 지장이 적지 않았다.

 ‘야간비행’, 서귀포에 와서 나는 그간 못했던 밤외출을 한껏 즐기고 있다. 시낭송회, 음악회, 탁구동호회에 나가고, 수요일밤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명상모임에 간다. 가끔 육지에서 찾아온 친구들과  이중섭거리 카페에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어도 전혀 부담이 없다. 그건 전적으로 ‘장애인 부모회’ 덕분이다. 주간보호가 2주간 방학을 했을 때도 부모회의 저녁 공부방은 쉬지 않았다. 귀가 시스템까지 있어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니 보통 고마운 일이 아니다. 매주 토요일에는 오전부터 오후 3시까지 특별활동반이 있다. 서랍장을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카톡으로 받아보면 대견하기 짝이 없다. 그 시간을 재미있고 의미있게 보낸다는 것이 여간 안심되는 것이 아니다.

역시,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장애문제의 당사자들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내가 지금까지 받아본 어떤 사회복지서비스보다 한 수 위였다.  10년, 부모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잔치를 한다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10년 전, 딸아이가 열 다섯살인 그때 나는 ‘어디 좋은 프로그램 없나’, 정보사냥을 하다가 실망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 서귀포에서는 부모들이 자조적인 써비스체계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아닌가. 10주년 축하잔치 날,  나는 다시 한번 ‘역시 서귀포!’ 무릎을 치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방의 장소를 싸게 빌려주는 서홍동 새마을금고를 위시한 금융기관들, 사회단체는 물론 친목단체들까지, 기업들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 개인들, 공부방 도우미로 봉사하는 해군사병들, 재능기부자들, 헌신적인 선생님들, 부모회의 유영신 회장은 ‘두 다리만 건너면 서귀포시민 전체가 연결될 정도’라고 말했다. 이들이 역어낸 촘촘한 그물망, 그것이 부모회를 키우는 요람이 되어 온 것이었다.

복지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왔다. 내 친구 중에 뇌성마비인 아들을 데리고 외국에서 살다온 이가 있다. 집앞 길가에서 애가 혼자 공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신사복차림의 이웃사람이 지나가더란다. 그러더니 되돌아와 아이와 공놀이를 해주더란다. 아주 잠시였지만 아이가 매우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그 나라에 몇 년을 더 눌러 살았다. 이런 이웃 7명만 있으면 아이는 일주일이 행복하다. 한달에 한번 이런 일을 해 줄 사람이 30명만 있으면 평생 행복할 수 있다. 장애 자체가 어려움이긴 하지만 장애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어려움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장애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배려시스템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이런 배려시스템의 혜택은 아기, 노인, 병약자, 모두에게 돌봄이 되는,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은 경험하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교육의 사명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장애를 가진 이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특수교육장학사의 말에 나는 울컥했다. 자존감, 하루하루 때우는 데 급급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말인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자존감, 어리거나 늙거나 아프거나 건강하거나 누구나 자존감을 가지고 살게 하는 일, 온 마을이 나서서 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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