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원로교육자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은 나고 자란 제 나라를 떠나 삼천리 금수강산 끝자락의 고도와 다름없는 서귀포에 뭘 하러 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 왔을까. 되물을 필요 없이 대동아건설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침탈해 온 것이다.

이제 그 실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해가 더해지면서 세상을 달리하고 있을뿐더러 기억마저 몽롱해져 있을게다. 필자도 미수(米壽)에 이른 한 촌 옹이다.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 회상해 볼수록 어렸을 적 겪은 일이지만 나라 잃은 슬픈 상흔(傷痕)이 때때로 되살아나 어딘가 모르게 전율이 감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우리들을 센징(鮮人) 또는 조센징이라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하면 조센징, 조센징 쿠세(조선인 버릇)라 해대 들을 때마다 맘이 상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쓰면서도 한국인이라 써야 당시의 한 맺은 응어리가 풀릴 것 만 같다.

필자는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설립한 서귀포 남 소학교 고등과(2년제)에 재학하고 있을 때 심상과 일본 학생들과 공부하다보니 그네들이 가정을 가 볼 기회가 종종 있어 일본문화를 어렴풋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서귀포에만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내 제주읍에는 학생 수가 많은 제주남소학교, 한림 성산포에도 일본인 거주지역이라 성산동(東) 한림에도 한림동 소학교가 있었다. 교명이 지역과 방위에 따라 붙여지는데 우연일치인지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학교는 동교 남교로 불렸다. 은연중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다며 항간에 책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듣고보니 철리에 어긋나는 말이 아니었다.

서귀포 지역 내 중요권좌는 몇 곤대에 불과했지만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경찰관 주재소, 우편국, 등기소 등 그러나 유독 면장만큼은 한국인이 임명돼 곡물 공출 일명 사람공출이라는 탄광징용 진지,  비행장 노역 징용 등 욕먹을 일은 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교육기관은 중견 농촌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 농업실수(實修)학교(내종에 2년제로 됨) 기숙사 생활. 정방폭포 윗자리에 즐비하게 들어선 모 재벌가의 별장자리가 당시 실수학교 기숙사 자리이다.

한국인 자녀들은 서귀북국민학교(현 서귀포초등학교), 일본인 자녀들은 서귀포 남 심상소학교. 이 학교는 심상과(1~6학년) 20여명, 고등과에 한국인 학생 3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2개 교실에서 복식수업이었다. 교장은 사와무라 징이찌(澤村人一) 여교사 고(鄕)선생. 심상과 6년을 마치면 모두 부모연고지인 본국에 보내 중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니 고등과에는 한국인 학생만 재학하고 있었다.

▲ 서귀포남소학교 고등과 1학년 일본인 학생들(1944). 원 내는 석주명 선생의 딸 석윤희씨.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인만 재학하는 심상과 3년에 세키(石) 상(님 지칭) 한국인 여학생이 있어 우리들은 동족애인지 늘 눈 여겨 봐 왔다. 때로 하교시간에는 채집통을 맨 청년이 오곤 했다. 우리 보기에도 뭔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선생님인것 같았다. 같은 연배인 사와무라 교장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극진한 예우를 하는 것을 봐 심상치 않은 명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은 식물표본을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경성제국대학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에 근무하면서 나비채집과 산방산 식물 채집하시는 분이라 장래 일본학계에서 이 분야의 대 학자가 될 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심상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세키(石)상 아버지이시다면서도 조센징이라 하지 않았다. 이때가 1944년 봄철이었다. 근간에 토평마을 길목에 세워진 나비박사 석주명(石宙明)선생 흉상 앞에 서니 경모(敬慕)감이 들어 옛 생각이 난다.

이따금 하교시간 쯤 되면 딸을 데려 토평마을까지 가려고 풍치림 간의 의자에 앉아있으면 한국인 학생들이 인사하면 그저 묵시(?示)조로 고맙다며 미소로 맞아주었다.

이때 한국인의 자긍심과 긍지를 드높여 주는 절호의 기회이었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우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선식민사령을 공포했다. 우리나라 고유의 성씨를 버리게 하고 두자로 된 일본식 성씨를 만들어 사용하게 함으로써 우리민족을 밀살하려는 악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일부 유생들은 자결 친일파들은 앞장서…. 우리들은 별이 별 성을 붙여버려 이름을 보고 한국인임을 알 수 없었다. 끝내 석(石)성(姓)씨를 지킨 민족의식에 경탄(敬歎)해진다. 박사님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정황을 들으니 아기자기했던 회상이 떠오른다. 석주명평전(2011 간 이병철 지음) 보면 그 세키(石)상은 석윤회로 미국 북일리노이 주립대학 미학교수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전교생이 찍은 흑백사진에 세키상 얼굴을 보니 세월이 무상함을 느껴진다.

서귀포남소학교 고등과 1학년 일본인 학생들(1944). 원 내는 석주명 선생의 딸 석윤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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