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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과 비통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일기장(2)[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서귀포신문 | 승인 2015.11.15 11:41
   
 

유독 6월에는 중문보통학교에서 성내 제주도사(島司) 산하에 있는 일본인 시학(視學)관이 학사업무 지도 차 온다는 전갈이 오면 청소로부터 학사일지 등 긴장했던 대목이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에 시가구 상(일본어 시학)이 온다면 급기에 유리창 닦기, 변소 청소, 낙서 지우기 안해 본 학생은 없을게다.

보면 우리 선생님과 다른데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모두가 나라 잃은 민족의 수난이었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일본이 제주도사(島司)를 위시해 그럴듯한 명분으로 학사업무 지도 차 일본 시학관이 내방하는 것은 연례행사로 돼, 특이한 접대메뉴가 있었다.

강정마을 큰 내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은어 사시미(회)와 구이였다. 밑창까지 시퍼렇게 내려다보이는 남동지 소 은어 무리들이 유어하며 반짝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잔 들고 나면 모두가 신선전입가경에 이르고 만다. 이런 접대는 학교 후원회장이 맡아 마을 유지들도 동석해 당면한 현안을 논의하는 기회가 됐다고 자술하고 있다.

해묵은 일기장을 띄엄띄엄 걷다보면 모자(아버지와 할머니) 상을 나란히 진설해 놔 초하루 보름 상망제의 애절한 곡성이 일기장에서 처량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큰일(대소기 혼인 잔치) 한번 치루는 데, 돼지 고깃 점을 놔 평판 후론이 심했는지 돗통 돼지가 효자사랑을 톡톡히 받은 어설픈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돼지우리에 동티가 났는지, 영문 모른 새끼돼지가 자주 죽는 통에 설상가상으로 한 때 심통했던 구절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을 청년단체가 주관해 연극회가 밤에 열리는데 일본 순사 임석하에 열렸다는 대목을 보면, 농촌 계몽 문화 활동가지 감시의 눈초리로 속박했으니, 얼마나 암울한 세상이었는지 짐작된다.

이렇게 날로 살벌해지면서 우리의 정서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가 문화실조 상태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심천전, 삼년고개, 홍도야 울지마라, 불효자는 웁니다. 전기불이다 확성기도 없는 시대에 가스불 켜놔 연극회를 연 우리마을 청년들이 문화 창출 의욕에 경탄(敬歎)을 금할 수 없다. 그 밖에 학교에서 여는 학예회 연극대본은 사전에 일본 경찰 주재소 검열제가 시행됐으니, 식민지 교육정책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수난의 비극이었다.

가족들이 벌통을 짊어져 산행했다는 기록을 보니, 여가에 취미로 다섯 통 정도의 양봉을 한 것 같다. 벌 한통 값이 5원, 이 기록을 보는 순간 소슬바람이 온 몸을 움츠러뜨린다. 우영팟 모퉁이에 벌통을 놔 그 근처에 뽕나무 열매가 까맣게 익어 부질없이 독식하려고 허술한 옷차림으로 벌통 밟고 올라서는 순간 벌떼는 왈칵 덤벼들어 사정없이 쏘는 바람에 혼비백산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명의가 왜 그다지도 많은지 어머니는 백장으로 초약처장 수소문 해 나섰다. 빨갛게 달아오른 온 몸을 시원하게 자주 어루만져주신 어머니의 따스했던 약손사랑의 감촉은 지금도 전신에 혈류가 돼 흐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서귀포 나들이 기록도 종종 적혀있다. 뭘 하려 8키로나 되는 원거리를 도보로 다녀왔을까.

이 시대에 서귀포 나들이는 온 동네에 소문이 파다했다. 유일한 관중나들이여서 그랬을 것이다. 애들 간에는 먹은 자랑 삼아, 왜(倭)밀가루 빵 사 와 먹었다. 동구리 사탕 물고 나와 얌얌 대니 오기가 나 맞장구로 우리 아방도 서귀포 갔다며 대응해 봤으나 도리어 풀죽고 말았다. 어린 맘에서 오랫동안 원망해 왔다. 일본글 해독할 무렵 소학교 4학년 쯤 되니 소년구락부란 소년 월간 잡지를 서귀포 갔을 때 마다 사들고 와 나의 독해력을 키워줬다.

동급학년에서 이런 잡지를 읽은 학생은 저 혼자라, 말하기(話方)시간에 신선한 화제가 많아 자주 나오라고 해 자신만만하게 나간다며 자랑해 댔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마치 아픈 자식에게 약을 먹이고, 병세가 호전되어 안도의 가슴을 어루만지듯이 빙긋이 웃으시며 속에 든 것이 있어야 말하지. 서서히 관망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유태인의 가정교육 성서인 탈무드보다 더 한 아버지의 가정교육의 규범과 삶의 지혜를 여럼풋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궁색해서 빵이나 눈깔사탕 못 사온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자각해 후세에 유훈으로 전하고 있다. 두뇌에서 영원히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자양분이 담겨있는 책을 주셨다는 것을 값진 교훈이었다.

서귀포 나들이 용건을 보면 금융조합 출자금 거래 보험, 우편국 소포 수령, 일본에 가 있는 숙부와의 조모님의 병세와 근황 소식 서신 등기, 그리고 생필품 고무신 구입 등 용무가 다양해 당시 물가표가 명기 돼 있다.

약용식물인 제충국 재배했던 선진 특이작목으로 농가 소득에 골몰해 왔던 기록도 남겼다. 다년생식물로 9월에 꽃이 무르익으면 따 건조해 두면 관에서 수매해 갔다. 수매하기 전에 맹탱이(짚으로 둥그렇게 엮어 만든 제주의 포대)에 담아 상방마루에 두면 독기가 풍겨서 파리 모기떼가 오지 않는다며 기피제로 이용해 왔다.

꽃가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녁무렵에 마당에 낭뎅이(줄기)를 태워 연기를 내면 모기향대용으로 요긴하게 써 왔다. 당시 뿌리는 상충제는 낀조루(일본어)가 있었으나, 비싸 가정 상용품목에 오르지 못했다. 이 제충국 재배는 2년마다 갱신해야 되고, 연작하다보니 지력이 급격히 떨어져 소득작물로 그리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그 때도 서당학생들에게 국방헌금, 출정황군(皇軍) 위문대 모집이 있어 학생당 2전씩 모은 어설픈 대목이 적혀있다.

일기장 말미에는 금전 차용명세가 이어져 가정 경제사정이 여간 어려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거래금액단위가 5원 미만이지만 신용이 있어 그랬는지 돈 융통이 빈번했던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수입금액이 무색할 정도이니 빚더미로 살아오면서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그 맘 이제야 혜려(惠慮)해진다. 이 외에도 여러 권이 수첩을 남겨 두고 있다. 언젠가는 누군가 제주의 세시풍속, 식민치하 교육과 농촌의 경제활동의 사학(史學)연구 자료가 될 것이다.

아버지의 혼이 담겨있는 이 일기장을 그대로 두면 일어로 써 놨기에 거들떠보지도 않을뿐더러 방치될까봐 우리말로 옮겨놓았다. 총명부둔필(聰明不鈍筆) 아무리 머리가 총명한 사람도 몽당연필말 못하다는 옛말이 절절하게 울린다.


※[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은 이번 호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이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서귀포신문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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