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처음 그 병원에 갔을 때 진찰실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내 조카가 거기 서 있는 게 아닌가. 의자에 앉아 의사가 우리 어머니를 진찰하고 문진하는 동안 나는 너무 신기해서 그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닮아도 어쩌면 이리 닮는단 말인가. 강원도에 사는 조카가 제주에 있을 리 없고, 더구나 조카는 의사와는 거리가 먼 조리사인 걸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눈앞의 닮은 모습에  계속 착각이 일어났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말했다.

"다, 좋으시네요. 아무 걱정 마시고 마음 편하게 지내셔도 됩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복음의 말씀인가. 여태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다녀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아니 기대조차 안 했다. 당뇨, 고혈압, 시력저하, 혈액순환 부족, 온갖 걱정을 늘어놓아 병원에서 나올때면 한숨과 걱정이 절로 들었는데…

어머니도 귀가 의심되시는지 의사에게 물었다.

"내가 당뇨가 있대요. 단 거를 일체 안 먹는데도 당이 높다고 하거든요, 그것도 괜찮아요?
"단 거 드셔도 돼요. 사람이 단 거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떻게 일체 안 먹을 수 있겠어요? 우리 어머님께서 단 걸 드신다해도 얼마나 많이 드시겠어요?"
"그렇죠. 어쩌다 조금이죠"
"그러니까요, 걱정 마시고 조금씩 뭐든 다 드셔도 됩니다"

의사는 손수 문을 열어 우리를 배웅했다. 병원에서 와서 배웅을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의사에게.

"참 신기하죠? 어머니"

병원 계단을 내려오며 하는 내 말에 어머니도 단박 동의하셨다.

"그러게, 참 신통한 소리를 하는 신기한 사람이네"
"아니, 제 말은 큰언니 막내아들 닮은 게 신기하다구요"
"아이구, 그렇구나. 어쩐지 낯이 익어 내가 이상하다 했어"

어머니와 나는 깔깔대며 병원을 나왔다. 그후 어머니는 혼자서 병원에 다니시기 시작했다. 가봐야 좋은 소리 못 들으니 안 가는 게 편하다고, 늙으면 어쩔수 없는 거라고 마다하시더니 혈압약을 타러 날짜보다 앞당겨 다녀오시곤 했다. 마치 멀리사는 손자 대신 보러가시는 것처럼.

하루는 미장원에 갔다가 그 병원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의사를 보면서 많이 배워요. 환자를 앉아서 맞는 법이 없어. 꼭 일어나서 맞이하고 일어나서 배웅하고, 젊은 사람이, 그거 쉬운 게 아닌데…"

육십이 넘은 나이, 미장원을 하면서 벼라별 사람을 다 보았을 원장님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예사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정기검진을 가실 때 일부러 따라가 그 의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항상 방글거리며 웃는다. 환자를 배웅하고 나면 새 환자를 맞이한다. 환자를 먼저 의자에 앉게 한 후, 자신이 의자에 앉는다. 얼굴을 뵈니 아주  좋아보이시는데요, 오늘은 옷 색깔이 아주 이쁩니다 정서적인 인사를 먼저 한다. 환자를 칭할 때 우리 어머님, 우리 아버님이라고 한다. 말을 할 때 항상 환자에게 다정한 눈길을 준다. 진료를 마치면 꼭 이런 말을 한다.

"건강걱정은 다 제게 맡기시고 마음 편하게 즐겁게 지내세요. 다 좋으세요, 지금"

병원에 다녀오시면  항상 기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오래전에 어떤 원로 의사로부터  들은 말이 기억났다. 내과의사는 약이 아니라 말로 병을 고치는 직업이라고.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의사를 만나기는 어렵다.  내 친구 중에도 의사들이 적지 않다. 사석에서는 유쾌하고 다정한 친구도 병원에서 환자로 만나면 사무적이다. 예민한 직업인데다가 환자가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 병원에 늘 대기자가 예닐곱 명씩 있는 걸 보면 바쁨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젊은 의사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감기가 걸려 병원에 간 날 대기실에서 티비를 보다가 우연히 내 고개가 왼쪽 벽으로 돌아갔다. 거기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다. '겸손하면'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살짝 물었다.

"아, 그거요. 제가 가훈과 원훈을 겸해서 지어본 겁니다, 하하"

아, 이거였구나. 겸손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거였구나. 의사를 진료를 마친 다음 환자가 뭔가 말을 더하기에는 눈치 보이는 게 보통 병원의 현실이지만, 바쁘시지만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했을 때, 안 바빠요, 천천히 다 말씀하세요라고 해주는 이 여유가 바로 겸손에서 나오는 열매였던 것이다. 업계의 베테랑이자 원로가 된 미장원 원장님이 배우신 것도 이런 겸손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겸손하리라.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리라. 겸손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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