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 시민기자의 식물이야기]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동네에 왕대왓이 몇 군데 있었다. 할망네 우영에 왕대가 많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쉬운 대왓이었을까, 대나무 아래 작은 길이 떠오른다.

한 번은 그곳에서 어떤 아이와 몰탈락을 했다. 허리 동강 난 대나무를 휘어 가랑이에 끼우고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대나무의 탄력을 음미(?)하는 놀이가 몰탈락이다. 몰탈락이 시시할 때쯤 불쑥 물었다.

“너 이름 세 글자로 말해봐.김 ㅇㅇ”
“마! 김이 뭐냐? 이름은 오로 시작하는 거다.”

윽박지르자 녀석은 복통 난 듯 인상 쓰며, 울듯이 뻗대며 끝까지 김이라 말했다. 원 고집도, 그때 내가 아는 사람 이름은 전부 오로 시작했다. 앞집, 뒷집, 옆집 모두 오 아무개였다.

어느 왕대왓 옆 밭은 빈 밭일 때가 많아서 놀기에 좋았다. 가끔 야구를 했는데, 지금 같이 투수가 공을 던지면 치는 게임이 아니고 한 손으로 공을 놓고 다른 손에 쥔 방망이로 쳐서 달려나가는 놀이었다.

놀다 보면 공이 왕대왓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놀던 아이들 모두 대왓에 담아져 꼼꼼히 뒤져야 찾을 때가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대나무 가지에 공이 걸려 버렸는데, 이때는 나무에 앉은 새 쳐다보듯 하거나, 혹은 헛일 삼아 돌멩이로 맞춰 보기도 하다 서로 헤어져 집으로 갔었다.

왕대는 오르기가 무척 힘든 나무였다.  낭질하는 아이도 몇 마디 오르고 미끄러져 내렸다. 양손과 양팔로 대나무를 휘어 감듯 안고 양발로 대나무를 잡은 후 무릎을 펴는 동시에 손을 잡아당겨야 오를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왕대왓에는 무서운 꽃이 살았다. 쫓아와 해코지할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이 아닌지 다들 피했다. 꽃이 뱀을 닮았기 때문일까? 지금도 께름칙할 때가 있다. 동네 하르방이 배엄대죽이라고 알려 주셨다. 가메기숟가락과 달리 이건 약이 안 된단다.

“왕대는 구덕 바위 돌를 때 썼주. 동네에 구덕 젓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므로 거래가 활발했쪄.

대왓 주인이 대나무를 쥐어 딱 맞으면 일락이라 불렀고 손가락 하나 더 들어가는 부피이면 일락일지, 두 개 더 들어가면 일락이지, 일락삼지 이렇게 부르고 값이 다 달라서. 자(尺)가 손이었으니 주인 손가락에 인심이 달렸던 거주, 여태껏 대왓 하르방 조막손이 생각난다는” 구덕을 절아 먹고 사신 분의 말씀이다.

‘락’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희한한 제주말인가 싶었는데 악(握)인 것 같다. 사전에 握은 ① 쥐다 ② 주먹 ③ 손아귀 ④ 줌이라고 나와 있다.

왕대의 쓰임이 없어지자 개간했는데 프로 개간 꾼이 하루에 한 평 정도 했다 한다.

아직 왕대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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