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숙희야, 내가 몇일 있다가 제주도에 가. 시간 있니?"

카톡에서 중학교 때 친구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친구가 이토록 좋은 것인가 싶게 손꼽아 그날을 기다렸다.

"친구를 만나러 온다고 생각하니 30년 동안 자주 오던 제주도가 새삼스럽더라"

친구는 시부모님제사가 있어 제주에 온 길이었다.

"우리가 14살 때 만났으니까  43년 된 친구구나, 세상에"

친구와 나는 용두암 근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 세월과 그 속에 별처럼 박혀있는다른 친구들과 추억을 헤아렸다.

"너,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어, 남편이 저녁 비행기로 내려오거든"
"좋아. 네 남편의 고향 제주도에서 제주도민으로 만난다니 이거 기분이 묘한데"

그 남편과 초면도 아닌데다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나는 단번에 오케이를 했다. 약속된 음식점으로 가는 차안에서 친구는 남편과 전화통화를 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내게 물었다.

"너 앞으로도 계속 제주에 살꺼니?"
"응, 그럴 거 같은데..."
"그럼, 잘됐다. 내가 오늘 제주에 확실한 인맥을 만들어 주겠어! 알아두면 좋을 사람들이야"

그렇게 하여 졸지에 나는 친구 남편의 7남매와  일본에서 오신 작은 아버님까지, 제주토박이 가족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저녁식사자리는 평범했다. 남자들끼리 같은 테이블에서 술잔을 나누고 여자들은 옆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흔한 가족모임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2차로 노래방을 가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나는 여기서 작별인사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 되시는 어른이 승용차를 타셨다가 일부러 내리셔서는 아주 강력하게 나를 초청하셨다

"친구도 오는 거죠? 안 오면 벌금 내야 돼!"

내가 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니 뺄 수가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나를 가족의 일원처럼 대해주시는 따뜻한 마음이 감사했다.

노래방은 아주 넓었다. 원탁에 다들 둘러앉았다. 누가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나는 살짝 부담을 느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딱 한곡을 불렀다. 그것도 거의 끝날 무렵에.
작은 아버지의 18번 '누가 울어'를 시작으로 노래방 화면에 예약곡이 다다닥 뜨는데 화면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둘째 누나가 바통을 받고 그 아들 되는 젊은 친구가 어머니 노래에 백코러스를 넣어 분위기를 확 띄우는가 싶더니  큰 누나의 노래가 시작되고 거기 셋째 누나가 합세를 하고, 넷째 누나의 노래, 둘째 매형의 노래... 이렇게 쉼없이 이어지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와 내 친구 뿐, 한번 무대에 나간 사람들은 의자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작은 아버지가 '못잊어'를 부르실 때 나는 노래가 한 순배 돌았음을 깨달았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한데 어울려 흥겹게 보내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제사를 받으실 부모님이 보시면 더없이 흐뭇하실 것 같았다.

"애들아, 내가 아주머니(형수) 제사에 왔지만 사실은 내게 어머니같은 분이시다"

노래방 대여시간이 끝나고 의자에 둘러앉았을 때 작은 아버지가 마이크에 대고 말씀하셨다. 노래방 마이크 특유의 에코가 퍼졌다. 뭔가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라 여겼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게난, 나랑 작은 아버지가 두 살 차이야. 울 엄마가 나 입히려고 옷 만들어 놓은 걸 우리 할머니가 갖다가 저 작은 아버지 입혔주게"

첫째누님의 응수에 가족들이 박장대소, "우리 어머니는 맨날 밖으로 다니고, 아주머니가 나를 돌봤지" 작은 아버지의 이 말이 신호탄인냥  갑자기 할머니에 대한 추억담이 쏟아졌다.

그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말괄량이 삐삐'처럼 동심을 가지고 사신 분이셨다. 식계 갔다올 때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떡을 하나씩 나눠줘 정작 집에는 몇 개 안 가지고 오셨고, 방물장수들을 거져 재워주고 집의 창문에서 길에다 대고 사탕을 뿌려 사람에게 나눠주셨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에 그런 할머니 때문에 할아버지와 자식들이 힘들었지만 이제와 보니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건 할머니의 그 베푸는 마음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작은 아버지가 다시 무대로 나가셨다.

"이게 진짜 제사다. 제사가 있으니까 이렇게 모여서 놀 수 있는 거야. 우리 내년에도 이렇게
모여서 놀자"

와하하, 짝짝짝 다들 박수와 환호성을 울렸다. "맞아요, 엄마도 살아생전에 제사는 파티라고 하셨어요"  작은 아버지가  "불효자는 웁니다"의 노래가사를 '어머니' 대신 '아주머니'로 바꿔서 부르신 다음, 다같이 일어서서 손을 잡았다. '만남'을 부르는 내내 사람들은 돌아가며 눈을 맞추고 웃음을 나누었다. 각본없는 멋진 공연, 제사 전야제였다.

노래방에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뭐, 이런 가족이 있나, 이들은  별에서 온 사람들 아냐?  홀린 듯이 서있는 내게 작은 아버지가 손을 내미셨다.

"오늘 같이 해줘서 고마워요, 내년에도 안 오면 벌금 내야돼!"

그 말씀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하늘까지 닿을 듯했다. 맞아, 이들은 별에서 온 가족이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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