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학 칼럼⑥]정현채/서울의대 내과

연재순서

① 질병에 대한 인류 투쟁의 역사
②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 사망 원인 1위인 암에 대하여
③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죽음의 여러 모습 (1)
④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죽음의 여러 모습 (2)
⑤ 의료현장에서 경험하는 죽음의 여러 모습 (1)
⑥ 의료현장에서 경험하는 죽음의 여러 모습 (2)
⑦ 의학연구로서의 근사체험 (1)
⑧ 의학연구로서의 근사체험 (2)
⑨ 현대인이 알아야 할 삶의 종말체험 (deathbed vision)
⑩ 인류에게 죽음이 사라지면 축복일까 재앙일까?
⑪ 자살에 관한 담론 (1) (자살을 하면 왜 안 되는가?)
⑫ 자살에 관한 담론 (2) (자살을 하면 왜 안 되는가?)

 

 사람이 물에 빠져 갑자기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멎었다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여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런데 오래도록 투병해 왔고 더 이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말기 질환자가 심장 박동이 멎었을 경우에는 심폐소생술이 오히려 고통만을 줄 뿐 편안한 죽음을 방해한다고 할 수 있다. 경주 트랙을 여러 바퀴 돌아 지칠 대로 지친 경주마를 채찍으로 치면 얼마간 달리기는 하겠지만, 말은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고 어서 경주를 끝내고 쉬고 싶을 것이다. 
 

2008년 12월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79세의 뉴질랜드 할머니가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는 문구를 가슴에 문신으로 새겼다고 한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살리려고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더구나 엎드린 자세로 쓰러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어깨에는 뒤집으시오 라는 문구도 새겼다고 했다.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의 이런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은, 사전의료의향서에 자신의 의사를 미리 밝혀 놓았어도, 막상 심장질환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면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을 할 가능성을 염려해서라는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원한다면, 이 할머니처럼 문신을 새기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한테 명확하게 밝혀 놓아야 한다. 자신이 뇌 기능의 심각한 장애를 입었거나, 질병 말기이거나, 노화로 인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사를 표명해 놓는 것이다. 즉 심폐소생술을 시행할지, 제세동기를 사용할지, 강심제나 승압제를 투여할지, 기도내 삽관을 하거나 인공호흡기를 연결할지, 그리고 인위적인 영양공급을 할지의 여부를 사전의료의향서에 명기해 놓아야 한다.
 

만일 통증을 조절해 주기만을 원했을 뿐 이러한 연명치료들은 결코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전의료의향서를 써 놓지 않았거나, 반대로 사전의료의향서는 써 놨으나 가족들에게 자신의 평소 의사를 알리지 않았다면, 남겨진 가족들은 심각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다. 환자 본인의 의사를 입증할 만한 게 없고 가족들 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의료진은 연명치료를 진행할 수밖에 없어서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일단 연명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현행법상 함부로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인위적인 생명유지 장치를 매단 채 기약 없이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건강하고 젊을 때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사전의료의향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밝혀 놓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이자 의무이다. 막상 회복될 수 없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가족들과 터놓고 대화를 하기 어렵게 되고, 그러다가 급격하게 몸 상태가 악화되면 의사를 표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중환자실로 옮겨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불의의 사고로 의식이 없는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 중 또 하나는, 자신의 건강 상태나 질병에 대해 제대로 알 권리이다. 일본에서 1970년대부터 바람직한 죽음 문화의 정착을 위해 노력해 온 알폰스 데켄 신부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환자에게 사실 그대로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이는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환자는 자기 병의 상태를 정확히 알 권리가 있고, 둘째, 가족과의 신뢰 유지에 필수적이며, 셋째, 병에 대한 계속된 의혹은 좋지 않으며, 넷째,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충실하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8년 전 필자가 직접 경험했던 사례이다. 68세의 남자분이 한 달 전부터 식사 후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나타났다며 병원을 찾아왔다. 체중이 빠졌다거나 복통이나 구토가 난다거나 피를 토했다거나 음식을 삼키기 곤란하다든가 하는 어떤 증상도 없었다. 몸 구석구석을 진찰했을 때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 분은 위내시경 검사나 해 달라고 청했는데, 위장 근처에 있는 간, 쓸개, 췌장에 병이 생겨도 증상은 유사하므로 복부초음파 검사를 같이 시행했다.
 그 결과 위내시경 검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복부초음파 검사에서 췌장에 종양이 관찰되었다. 췌장암이라는 진단 아래 외과에서 개복수술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변 장기로 췌장암이 심하게 퍼져 있고 림프절에도 암이 많이 퍼져 있어 완치는 불가능한 상태로 판정하고 수술이 종료되었다.
 수술이 끝난 후 환자의 가족들은 담당 의료진에게 신신당부하기를, 말기 암이라는 사실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자에게 절대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의료진은 환자에게 일체 사실을 말 할 수 없었고, 환자분은 수술이 잘 됐다고 하는데 내 몸은 왜 이 모양이지? 하고 의심하는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가다가, 수술 받은 지 한 달째 되는 날 양쪽 폐로 암의 전이가 심하게 일어나면서, 그로부터 사흘 뒤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의료진 모두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다가,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황망하게 죽음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병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과 권리를 가족들에 의해 박탈당한 셈이다.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얘기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와 같이,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하고 우울해하겠지만, 점차 자신과의 타협을 거쳐 현실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가 되든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당부를 해두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해주고, 또 가족이나 친지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건 모든 개개인에게 너무도 소중한 일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