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내가 어릴 적에는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았다. 자동차의 위험도 없고 유괴범죄 따위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놀 때, 어른들은 동네 구멍가게 앞의 평상에 나와 앉아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며 이웃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더운 여름날은 단칸방에  4남매, 5남매 아이들과 복닥거리기보다 길에 나와 있는 것이 훨씬 시원하고 평화로웠다.

그 시절의 이런 골목 풍경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어른들은 동네 아이들 속에 있는 자기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자식에 대한 객관화가 이뤄지는 기회였다. 여기에 자식농사의 선배인 연장자들의 조언이 더해지니 부모로 성장하는 학습장이었던 셈이다.

아이들로서는 동네어른들 모두의 관심과 눈길 속에서 클 수 있었다. 가끔 잔소리와 간섭이 귀찮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속에는 어른들로부터 돌봄을 받는 안정된 분위기가 있었고 사회성이라는 것도 시나브로 익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세상이 온통 다 바뀌어 가족끼리도 제 방에 들어앉아 스마트 폰으로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살게 되었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공감대가 없어지고 소통이 되지 않으니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말이 배부른 소리만은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서귀포에 추억속의 구멍가게 평상같은 사랑방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느 화요일 저녁 8시, 나는 저녁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동문로타리 근처 미래치과 3층, 문 옆에 혜나 서원이라는 작은 문패가 붙어 있었다. 지혜나눔을 줄여서 혜나라고 부른다 했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열 댓명 쯤 되는 사람들, 하나같이 수더분한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한달 동안 읽은 책 한권을 놓고 돌아가며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한 마디씩 풀어냈다.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성장과정과 현재의 모습이 진한 국물 맛처럼 다 녹아들어 있었다.

자기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급기야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휴지를 건네 주는 손길,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 그 분위기가 너무 따뜻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왜 사랑방이라고 하는지 단박 이해가 되었다.

"남편이 독서모임에 먼저 나왔어요. 그러다가 저도 나오게 되었는데 혜나 덕분에 부부 사이도 엄청 좋아졌어요. 남편이 독서모임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편을 이해하게 되었고 책이 공감대가 되니 이야기거리도 많아지더라구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기 듣는 것도 참 도움이 돼요. 내 생각에만 갇혀 살았구나, 내가 변하고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니까 뿌듯해요"

사람살이에 있어 지혜가 무어 그리 특별한 것이랴. 모여서 배우니 성장의 기쁨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앞에 자기를 솔직히 털어놓으니 소통의 기쁨,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하는 존재임을 깨달으면 지혜는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을 계속 나누어가니 복리에 복리에 복리로 저마다의 지혜창고가 풍성해지는 것이리라.

월요일에는 아이들 독서모임이 있다고 했다. 9살에도 나름의 인생 경험이 있고, 14살도 분명 뚜렷한 인생의 과정이니 당연히 나눌 수 있는 독특한 지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은근히 아이들 모임에 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논술이나 독후감과 달리 살아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고 아이는 어른의 스승(영국시인 워즈워드의 말)이라  했으니 그들 안에서는 분명 어른들이 잃어버린 순수한 지혜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이 제한이 있어 안 된다고 하면 마음의 나이로 우겨보리라 다소 뻔뻔한 마음까지 들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영어공부 모임에서 시작되었어요. 어떤 영어 선생님 한 분이 재능기부를 해주셨거든요. 애들 공부를 통해 만난 부모들이 우리도 뭔가 해보자 해서 독서모임을 시작했고 그게 혜나서원으로 발전한 거지요"

한 알의 밀알이 썪어 밀밭은 만든다는 것은 인류 농경역사에서 최초의 지혜였다. 지혜나눔은 결국 지혜의 실천이었구나!

이제 1호광장에서 동문로타리를 향해 가는 넓은 도로가 내게는 어린시절의 동네 골목길 같이 포근하다. 구멍가게 앞 평상처럼 척 걸터앉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어른 아이 모여서 사는 이야기에 고개 끄덕일 수 있는 혜나,  누구나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활짝 열린 혜나서원이 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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