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오한숙희가 만난 서귀포사람들
100살의 지혜가 말한다.오한숙희의 [만남]
오한숙희 | 승인 2015.12.31 09:01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안 일어난다.”

제주에 여행 온 친구와 올레길을 걷다가 이 구절을 말해주었더니 친구가 씩 웃었다. 이미 그 책 읽었나?

“아냐, 안 읽었어”

그럼 씩 웃은 이유는 뭐지?

“우리 엄마가 4년전에 돌아가셨잖아. 그런데 지나고보니 엄마가 평소에 툭툭 던져주신 말들이 다 명언이더라구. 우리 엄마도 창문넘어 도망치지만 않았지, 똑같은 말을 진작에 하셨거든.”

“에이, 그럼 너네 엄마말 표절한 거네”

내 말에 친구는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녹음을 해뒀으면 저작권주장을 했으련만 아쉽다고 했다.

내가 제주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 진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가 있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와 한방을 쓰고 살았어요. 우리 할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시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얘야,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하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그 말이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나 스스로 진진이라는 별명을 지었어요.”

   
▲ 그림/장희록.

그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만화영화 <호호아줌마>가 떠올랐다. 숲속에 사는 호호아줌마는 갑자기 몸이 작아지는 병아닌 병에 걸렸다. 내가 병에 비유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자기 몸이 손가락 만하게 작아질 지 본인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필요할 때 알아서 작아질 수 있다면 능력이라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철저히 수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주제가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오늘은 오늘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하호호 아줌마, 우리 호호 아줌마. 숲속친구 꼬마친구 모두모두 즐거워”

호호아줌마는 자신이 일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벌어지는 일을 그저 감당할 뿐이다. 철저히 수동적이다. 드라마나 운동경기를 흥미진진하게 보듯이, 자기 앞에 닥친 인생사를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으로 여기신 흥미진진 할머니는 현실세계의 <호호아줌마>였다.

87세를 코앞에 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어떤 일 앞에서 팔팔한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마다 억지로 못 사는 거다 하시며 다독이신다.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니 제 맘에 안 들어도 순리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한다는 생각은 내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되고, 이왕이면 잘해야 한다는 욕심이 되고, 생각만큼 잘 안 되었을 때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니 내 앞에 닥친 모든 일을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으로 흥미진지하게 맞는다면 삶에 고통은 없을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작은 사건이 터졌다. 살고 있는 년세 집의 집세가 껑충 뛰어 이사할 생각에 큰 걱정을 안했는데 마침 딱 참한 집이 나타나서 만세를 불렀다. 집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에게 집 구했다고 연락을 다 돌렸는데 갑자기 그 집에 사정이 생겨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늙음은 낡음이 아니라 익음이라는 말처럼, 그 소식앞에 익음과 덜익음이 한 눈에 드러났다.

어머니는 집을 썩 맘에 들어하셨음에도 더 좋은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보다고 순순히 마음을 접으시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길목,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은근한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나이가 주는 지혜, 익음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이다. 60세가 코앞이다. 공자님은 이 나이에 이르면 어떤 말이 귀에 들려와도 거슬리지 않는다 하여 이순(耳順)이라 하였다. 들려오는 모든 것이 순리임을 안다는 뜻일 게다.

“약속된 계약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에 그것이 순리인가 보군요하고 순순히 넘길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건, 서귀포에 산 세월의 선물이 틀림없다. 이곳에는 잘 익은 장수노인이 많다. 몇일전에도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올해 딱 100살 되신 그의 할머니께 인사드렸다. 친구가 오난 좋구나 하시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 손을 통해 100살의 지혜가 체온처럼 내게 전해졌을 것이다. <살암시민 살아진다고>.

오한숙희  sgp1996@hanmail.net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한숙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697-81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정로 62번길 4, 4층(서귀동 만남빌딩)  |  찾아오는 길 : 만남빌딩 4층
제보 및 문의 : 064-763-4556/4455  |  팩스 : 064-763-4457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제주 아 01006  |  등록일 : 2006년 7월 26일  |  발행인 : 송형록  |  편집인 : 안창흡
상호 : 서귀포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616-81-16330  |  개인정보책임자 : 양용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용주
Copyright © 2017 서귀포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