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 강영은 시인.

 추억은 시간 속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 무늬다. 상감무늬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제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이나 향수를 각별한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은 그 무늬가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괴롭고 슬픈 추억이라도 시간 속에 여과된 무늬는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풍비박산된 초가지붕, 강풍에 날린 기왓장과 함석 간판, 길에 드러누운 전신주와 가로수, 태풍이 지나간 아침마다 황폐해진 거리를 바라보는 유년은 황량했지만 생각해보면 그 황량함마저, 그립고 애틋하다.

아랫목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삶은 고구마를 먹던 그 시절, 올레를 돌아나가던 바람소리며 한 여름 내내 멀구슬나무에서 울던 매미소리, 흰 눈이 쌓인 귤나무 아래 몇 시간이고 서 있던 첫사랑, 모두 마음을 설레게 하는 소리며 장면이다.

다시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축복은 아니다. 실향민들과 새터민, 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들, 그들의 슬픔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다.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사람에게 고향은 해질녘이면 제 둥우리로 찾아드는 새들에 비견할 만큼 소소한 행복일지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매일 숨 쉬는 공기의 중요성을 모르듯 감사함을 잊고 살 때가 많은 우리다. 고향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힘을 부여해주는지 고향을 떠나본 사람들은 안다.

떠난지 40년, 다시 돌아오기까지 강산이 네 번 변했다. 제주를 떠나던 그날부터 그리움의 종착지였던 고향 서귀포, 언제 어떻게 세월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뭍의 생활에 찌든 마음이 마냥 철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 하다.

▲ 이중섭 작 '그리운 제주도 풍경'.

정지용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노래했듯  낡은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처럼 바랜 기억을 들고 다시 돌아온 고향은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부모님 생전에 종종 다녀가곤 했지만 일상에 쫓겨 ‘수박 겉핥기’ 식의 짧은 여정 속에 변화하는 모습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고향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광에 낯선 관광객처럼 보는 것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제주를 떠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어린 시절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제주는 이제 보물섬으로 그 아름다움과 고유함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바이지만 어린 시절, 늘 가까이 있었기에 청맹과니처럼 보물의 참된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귀향의 꿈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 셈이지만 자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한 달의 절반을 제주에 내려와 고향 찾기에 골몰해 있는 요즘, 낡고 찌들었던 삶이 싱싱하게 활력을 되찾아가는 것을 느낀다. 돌아온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돌무더기 가슴 답답한 날이면 제주행 비행기를 탄다  바닷가 빈 집으로 돌아간다 잡초 무성한 밭을 일구고 밤바다에 어망을 던져두니 물 밖으로 나온 밤낙지처럼 눈이 맑아진다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었던 서울을 도망치듯 벗어난 일이 그대 탓인가, 물결은 한결같은 문장에 밑줄을 칠 뿐 별빛에도 눈동자에도 가없는 밀물
 
사람을 꽃이라 부르는 일도 사람을 흉기라 여기는 일도 그때는 솔깃했으나 모든 비유는 낡아지는 법 내 스스로 산을 그대라 불렀고 바다를 그녀라 불렀으나 지금 나에게 그대도 없고 그녀도 없으니 스스로 젖은 적 없는 저, 산과 바다를 무슨 비유로 노래할 것인가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尺 길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  

그 바닷가에서 섬이 된 사람들을 오래 기다렸다
                                 -졸시 <귀거래>전문

                                           
그렇다. 고향은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처럼 사라져 버린 기억 저편에서 파랑이는 삶의 이편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시켜준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접속되는 곳, 고향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새로이 갖게 된 것은 고향이 내게 베풀어준 환영의 선물이리라. 여섯 번째 시집 <마고의 항아리>를 통해서 고향에 대한 목마름을 아낌없이 풀어놓은 적이 있다. 내 몸에 젖어들었던 고향 제주의 바람과 파도와 숨비 소리는 내 시 속에 고스란히 녹아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세상이란 바다를 보여주셨던 부모님은 지금 안계시지만 바람과 싸우던 아버지, 바람의 옷을 입고 파도를 건너는 어머니의 숙명을 노래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제주의 딸로 다시 태어나리라,

■ 강영은 시인 약력.
195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여고, 제주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했으며, 시예술상 우수작품상(2006년), 한국시문학상(2012년) 수상 및 아르코문학창작기금(2014년)을 수혜했다. 시집으로는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 外, 공동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마, 미얀마>가 있으며 12인 영역시집 『Faces of the Festival』가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역임,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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