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 강영은 시인.

우리는 흔히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한다. 흐른다는 것은 정지된 어느 정점의 끊임없는 변화 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의 순서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대부분 과거, 현재, 미래를 차례로 거론한다. 하지만 기억이 재현해내는 시간은 순서 없이 구현되는 시간이다. 단순한 과거로만 돌릴 수 없는 기억의 저변에는 시간이 변주해낸 공간이 들어 앉아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삶의 궤적을 추적해내기도 한다.

예촌 마을에 눈이 날린다. 흰나비떼처럼 나풀거리던 것이 수만 마리의 벌떼처럼 몰려와 잿빛 허공을 뒤덮는다. 쌓일 새도 없이 녹아내리는 눈을 보며 실소를 머금는다. ‘제주도의 눈은 내리면서 녹는 눈’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난날의 오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제주에도 눈이 내리나요?”

“그럼요, 내리면서 녹는 탓에 눈 쌓인 풍경은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내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한 시인이 질문을 던졌을 때, 아무런 망설임없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대답한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따뜻하다는 효돈에서 성장한 탓도 있겠지만 제주도가 따뜻한 남쪽이라는 점을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다. 제주도처럼 변화무쌍한 날씨를 가진 곳이 없다는 걸 알지 못했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도 눈은 내리면서 녹고, 그늘진 응달에 눈물자국처럼 남은 자취를 본다.

여고 시절,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려면 5,16도로가 아니면 일주도로 밖에 없었다. 지금에야 평화로, 번영로, 남조로 같은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시간을 조금 더 보태면 되지만 5,16 도로에 눈인 쌓이면 어쩔 수 없이 일주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제주도를 반 바퀴 돌아야 집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해 겨울방학, 동 일주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차창에 기대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그 때, 한라산에 가로막힌 서귀포는 내가 돌아가야 할 가장 먼 곳이었다.

유리창에 칸칸이 박혀 있는 어둠이 낯설었다. 성산포를 지날 때 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초가집들이 환상처럼 다가왔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한 구절처럼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때의 경이로움이 눈(目)을 새롭게 했던 것일까, 흑백의 그 풍경은 마음의 수묵화로 오래도록 남아 있다. 잔설의 기억들은 詩가 되어 주었다.

▲ 그림 / 강요배.

쏟아지는 눈발 아래 몇 시간이고 서 있던 까까머리 소년,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소년의 젖은 눈이 마음에 뒤꼍을 들였던 것일까, 2008년 세 번째 시집 속에 수록된 시 '오래 남는 눈'은 해가 지나도록 잔설로 남아 있는 마음의 뒤꼍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탄생했다.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푸르게 눈 뜨는 깊은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 했으리           -졸시<오래 남는 눈> 전문

뒤꼍은 혼자 숨어서 울기 좋은 곳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나만의 은신처, 서늘한 자의식의 공간이었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잎사귀에 귀를 묻고 싸락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발 듣는 소리에 공연히 서럽기도 했다. 휘파람을 부는 소년을 따라 뒷담을 넘고 싶었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 구두를 깁는 사내의 아낙네가 되어도 좋다고, 서툰 사랑의 종착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한 뒤꼍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늘을 알게 되었고 그 그늘을 사랑함으로써 그늘보다 더 깊은 슬픔을 껴안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아무도 몰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구석진 자리에 남아있는 그것은 자신만 아는 풍경을 이룬다. 양지에서 음지로 서서히 빛을 이동시키는 저녁의 뒷모습 같은 풍경을 따라가면 뒤꼍이 있다. 아무도 몰래 주저앉아 우는 당신의 뒤꼍, 응달진 당신의 마음을 ‘오래 남는 눈’으로 위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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