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장미꽃처럼 화려하다든가, 난초처럼 청초하다든가, 여성을 비유하는데 있어서 꽃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꽃이 지니고 있는 빛깔이나 향기가 여성이 지닌 속성에 다른 어떤 말보다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할미꽃이나 호박꽃의 비유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제주 여성의 생활력이 해녀라는 직업군을 통해 한국 넘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질 갈 때 젖먹이를 데려가는 해녀의 모습을 본적 있다. 구덕에 아기와 잠수할 용품까지 함께 넣고 가는 뒷 모습이, 그 모성애가 남달라 보였다. 몇 년 전까지 방영됐던 이산가족 찾기 TV 프로그램에서도 제주도를 고향으로 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걸 보면 내 추측이 맞다 싶다.
 

43 같은 지난한 역사와 고통스러운 사람의 애환 속에서도 자식을 버리지 않는 제주 여성을 어떤 꽃에 비유하면 좋을까,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제주 여성의 핏줄 속에 들어있는 유전인자가 활짝 꽃 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이미 만개한 제주 여인의 드높은 향기를 노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추운 겨울 날, 햇살 따뜻한 마루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청초한 향기가 흘러나오곤 했다. 화분대 위, 보일 듯 말듯 핀 이상한 꽃에서 나는 향기였다. 아버지가 기르시던 그 꽃들은 어린 눈에 그다지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그 꽃이 제주 한란이란 것을 안 것은 서울의 어느 꽃집에서였다. 고졸한 멋을 더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허공을 베어내는 이파리며 여인의 귀밑머리 같은 꽃망울이 새삼 고고했다. 신비디움이나 호접란의 화려함은 한란의 조촐한 자태보다 누추해 보였다.
 

제주 한란은 동양란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난일 뿐더러 생명력도 강하다고 한다. 선물로도 쓰임새가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식물종에 있어서 종 자체가 지정된 것은 한란뿐인데다가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까지 받았다고 하니 이 또한 제주의 자랑거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면면을 알고 나니 제주 여인을 비유하는데 이만한 꽃이 있을까 싶다. 시린 바다 속으로 뛰어들던 어머니의 숨비소리처럼 퍼져가는 향기를 맡노라면, 비바리였던 나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꽃이었던 한 시절로 되돌아가 문득 설레이기도 한다.

 
 비바리는 제주에서 자생한 꽃이다.
 제주의 흙 속에 묻힌 진짜 뿌리가 아니면
 잎과 줄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뿌리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마존 유역에는 몇 개씩 달고 다니는
 부족도 있다지만 뿌리 행세를 하는
 가짜가 피우는 것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이다.
 비바리는 바다를 길들이는 고래를 꿈꾼다.
 외로울수록 차고 높은 호흡을 내 뿜는다.
 이어도를 바라보는
 꽃은 그렇게 살촉을 매단다
 도시마다 그녀를 복제하는 꽃집이 있다지만
 손돌이추위 속에서도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선돌 앞이나
 고래 심줄 같은 물줄기가 등을 껴안는
 돈내코 부근에 가면 암노루처럼 보짱한
 그녀들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는 해발 900미터
 눈 속을 달리는 두 다리가
 섬 밖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곳이
 그녀들의 북방 한계선이다.
 -졸시 <제주 한란> 전문
 
 뭍에서 떠도는 삶은 살촉을 매단 삶이다.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이 되지 않기 위해 내뱉었던 호흡들, 도시의 소음과 먼지 속에서 메말라가던 허파꽈리가 이제 맑은 공기 속에서 숨을 쉰다.
 

집 부근에 있는 돈내코를 찾아가본다. 겨울임에도 상록활엽수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오가는 인적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다. 어린 한란들이 서식한다는 숲길을 거닐어 본다. 아둔한 눈길에 보일리가 없지만 시린 물소리가 숨을 죽인 고요 속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흠향한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결 따라 몸속의 DNA가 물결친다. 계곡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꼭 그만큼 깊어진다. 삶의 어떤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제주 여인의 맑고 청정한 기상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제주의 딸인 나도 제주 한란임에 틀림이 없다. 뿌듯함이 가슴 가득 들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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