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실수란 대개 자신의 고정관념에 빠져 성급하게 일을 치루거나 과도한 의욕이 앞서갈 때 일어난다. 본의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대개 상대의 실수에 관대함을 가진다. 그만큼 실수는 쉽게 간과되고 중요한 의미도 강조되지 않는다. 실수를 거듭하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진 것처럼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실수할까봐 끊임없이 걱정하거나, 실수할까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실수는 마음을 찌르는 흉기가 된다. 자신감에 구멍을 내고 의욕을 구멍 내는 고약한 송곳이다. 송곳에 찔린 상처가 아프듯, 실수가 낳은 상처도 아프기 마련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환부가 번져 자괴감과 무력감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베우게 된다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다. 

작년 이맘 때, 귤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마당 겸 텃밭에 있는 10그루 남짓 귤나무이지만 잘 가꾸리라 마음먹었던 터였다. 가지치기를 해야 귤이 잘 열린다는 말을 듣고 의욕이 앞섰던 것이다. 북풍이 심했지만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가지를 쳐내야 큰 가지가 잘 자라는 줄 알고 있는 나는 평소처럼 어린 가지에 사정없이 가위를 들이댔다. 덥수룩한 머리칼 같은 잔가지들을 쳐내자 헐거워진 공간이 이발을 끝 낸 뒷덜미처럼 시원하고 산뜻했다. 잔가지와 잎사귀가 발아래 수북이 쌓여갈 무렵 지나가시던 동네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어떵허잰 경 햄시니"
 "무사마씸"
 "경 쫄라불민 귤이 열리느냐?"
 

가을에 돋은 새순이 다음 해에 열매 맺는 것을 까맣게 모른 나는 열매 맺지 못할 가지만 남기고 열매 맺을 가지는 죄다 자르는 범실을 범했던 것이다. 농사에 대한 무지함의 소치였지만, 내 눈이 탁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패착의 경험을 어찌 글로써 깨우치랴,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한 눈의 실책을 회복하는 길은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청견(淸見)이라는 귤을 선물 받았다. 맑게 본다?, 탐욕 없이 본다?,  사념 없이 본다? 어떤 뜻으로 읽어도 군자와도 같이 빛나는 이름을 지닌 귤이었다. 서울에 사는 아들에게 청견을 택배로 보냈던 그 날, 원고를 청탁한 잡지사에 한글 파일로 된 청견(淸見)을 보냈다.

 바람이 북풍을 몰고 계절의 끝자락으로 사라진 어제는 귤나무 잔가지를 쳤다 어린 목숨만 골라 벤 망나니가 되었다 가을에 돋은 가지라야 꽃을 피운다는 걸, 꽃피지 못할 목숨만 남긴 허실을 접하고 나서 베이비박스에 어린 것들을 내다버린 미증유의 봄이 밥 때를 놓아버렸다

 어느 눈(目)의 굴욕일까, 귤도 사람도 되지 못한 패착을 찾느라 오늘은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건피증 앓는 살갗에 손을 얹고 오렌지와 교배한 귤나무만 착실히 읽었다 몇 번의 계절을 넘기다보면 슬픔도 맑아져 윤기 나는 이마를 남긴다고, 귤나무는 이마에 새겨진 푸른빛을 모조리 지웠더구나

 그 빈자리를 헤아리는 눈이 상등품과 하등품을 고른다는데 까마귀처럼 흐린 내 눈은 낯짝이 두터운 오렌지와 말랑말랑한 귤이 서로의 본색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보며 利와 害가 서로를 돕는 일이 무공해라는 걸 배우는 중이다

 청견 한 박스 보내니 가렵다고 너무 긁지 마라, 저토록 노랗게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푸른색을 버렸겠니, 상처가 꽃이 되고 부스럼딱지가 열매로 자라는 일이 쉬운 일일까 마는 虛와 失마저 푸르게 보는 이 봄에는 딱지 떨어진 귤나무에도 죽은 내 안목에도 새 살이 돋지 않겠니
 -졸시 <청견(淸見)> 전문
 

성인이 되어서도 피멍이 들도록 가렴증이 돋는 아들, 살비듬이 떨어지고 부스럼딱지가 돋아날 때마다 얼마나 가슴 아픈지, 자라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에미의 실책은 아닌지, 치유되지 않는 아토피와 싸우면서도 늘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들에게 자신의 아픔도 엄마의 아픔까지도 맑게 보아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인간은 걷기 위해 넘어지는 법을 알아야 한다. 또한 넘어져 본 사람만이 걸을 줄 안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크든 적든,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자신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수란 꼭 필요한 경험일지 모른다. 실수는 경험을 낳고 그 경험을 통해 더욱 현명한 판단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귤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매가 매달렸다. 해거리 풍년을 맞은 귤나무 덕택에 내 눈의 실책을 조금 회복한 셈이지만 어린 목숨을 함부로 대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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