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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의 향기(2)원로에게 듣는다 - 素農 오문복 선생
오문복 | 승인 2016.02.18 11:21

 

 

   
 

한학자이며 향토사학자이신 서예가 素農 오문복 선생은 향토사 연구에 바쁘시다. 잊혀져 가는 제주의 민속자료 정리와 고서 발굴, 번역 작업 등이다. 素菴 현중화 선생님의 애제자로서, 제주소묵회 일원으로서 후학양성 등에 나서고 있다. <편집자 주>

향교를 말할 때 그 연원은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라든지 박사를 두었던 백제, 신라의 대학(大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들어와 왕건을 비롯해 역대 왕이나 지방 호족들도 유교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지방교육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는 더욱 밀접한 연관성을 맺게 된다. 과거가 유학교육의 성과를 도출하는 제도라고 보았을 때 지방의 교육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유교이념을 앞세운 조선조에 들어서 본격적인 지방교육제도로 정착하는 향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을 때 제주향교의 최초 설치는 태조 원년(1392)의 일이다. 부대도호부목 등의 향교 설치와 역사성을 함께 하는 것이다. 太祖元年壬申鄕校成樣이라는 기록이 뚜렷하다. 그동안 제주지역에서 발간된 역사지지 가운데 간혹 태조 3년(1394)에 향교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이유는 왕조실록의 태조3년조 내용을 오독한 때문이다.
 

태조실록 3년(1394) 3월 병인(26일) 조에 都評議使司上言,濟州未嘗置學校其子弟不入仕於國故不識子不知 … 上從之.라는 기록에서 未嘗置에서 嘗(맛볼 상이나 일찌기, 과거로부터의 뜻으로도 활용됨)의 의미를 빼트리면서 바로 그해(1394년)에 왕(태조)의 윤허를 받고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오기하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번역을 옮기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기를 제주에는 학교를 설치한 적이 없으니 그 자제들이 나라에 입사하지 못합니다. … 바라건대 지금부터 교수관(교수관)을 두어 토관의 자제 중 10세 이상은 모두 입학시켜 그 재질을 양성하고 국시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고 되어 있다. 향교 창건 연대를 태조 원년으로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기록을 보더라도 역시 태조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왕조실록 탐라록 중 태종실록.

1392년(태조 원년)에 제주향교를 비로소 제주읍 일도리 구교동에 지었다. 1435년(세종 17)에 안무사 최해산이 중건했고, 1466년(세조 12)에 절제사 이유의가 중수했다. 1582년(선조 15)에 목사 김태정이 성인을 모시는 사묘는 만세토록 우러러보는 곳이다. 그런데 일반 민가 사이에 끼어 있고 또 궁술 연마장과 마주 대하는 장소에 있는 것은 영예를 높이는 본 뜻이 아니다 하며 가락천 동쪽 고령전에 옮겨 세웠다. 1668년(현종 9)에 목사 이인이 가락천 서쪽 옛터로 옮겨 세웠고, 1724년(경종 4)에 화재로 인해 목사 신유익이 가락천 동쪽 옛터로 옮겨 세웠다. 1755년(영조 31)에 목사 홍태두는 터가 낮고 습하다 해서 이도리 광양에 옮겨 세웠다. 1798년(정조 22)에 목사 조명즙이 대성전을 중수했다. 1827년(순조 27)에 목사 이행교가 문묘의 터가 사면에서 바람을 맞는다 해서 서문 밖 용담리 비룡동 현재의 터에 옮겨 세웠다. 대성전 안이 습기가 차고 축축해 대자리가 썩고 상한다 해서 1848년(헌종 14)에 목사 장인식이 벽돌로 1척 높이의 담장을 쌓아 습기가 차는 것을 막았다. 1851년(철종 2)에 목사 이현공이 서재를 세워 여러 유생들의 학업을 권장하고 녹봉을 지급했다. 1872년(고종 9)에 목사 조희순이 중수했다. 
 

이와 같은 1392년 향교 완성 기록은 김처례(金處禮)의 구향교비(舊鄕校碑)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비문은 현재 제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옮겨 세워져 있는 권학비에 새겨졌던 내용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 이 비석은 글자가 모두 지워진 백비 형태로 존재하면서 아쉬움을 던져준다. 그리고 권학비(학문 탐구를 권함)라 하기보다 건학비(학문의 전당을 세움)라 해야 맞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 제주일고 교정에 옮겨 세워진 권학비.

1392년(태조 1) 학교가 완성됐고, 1435년(세종 17) 향교가 다시 지어졌다. 1466년(세조 12) 봄에 이유의가 절제사로서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 먼저 문묘에 참배했는데, 대들보가 허물어진 것을 안타까이 여겨 새롭게 하고자 뜻을 세웠다. 이인충 판관과 논의한 결과, 제주 감영의 군사들에 명을 내려 순번에 따라 공사에 투입시켰다. 교수관 문소조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했는데, 선비들은 앞다투어 일을 했고, 목수와 기술자들은 재주를 다해 지어 나갔다. 이유의 목사는 공무가 없을 때마다 몸소 공사장에 와서 지휘했다. 이에 문묘와 좌우행랑, 기숙사, 대문과 담장, 강당, 제기류, 책상, 위패, 부엌, 마구간과 화장실 뜰, 도로들이 수십일 만에 완연히 새로워졌다. 고을 사람, 원로, 학생, 어른과 아이들 할 것 없이 서로 다투어 축하하며 상호간에 학업을 권장했다. 또, 말하기를, 목사의 공적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를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면서 김처례에게 부탁해 글을 짓도록 했다. 김처례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의 흥성과 폐지는 다스리는 도리의 왕성과 쇠퇴에 크게 관련되어 있다. 학교 건물을 새롭게 했으니, 학착도 새로워져야 마땅하다. 교수들은 세종께서 특별히 하사한 책들을 정성스레 받들고, 성현들의 뜻과 마음이 담긴 경전을 여러 학생들에게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며 아침저녁으로 더욱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다. 주자의 백록동규를 걸어 두고 계속해 우러러 받들며, 목사가 향교를 중수한 아름다운 뜻을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청소하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고 앎과 실천을 함께 추진시켜 간다면 성현을 기약할 수 있다. 열채 남짓 작은 마을에서도 오히려 충신이 생겨나거늘, 이 제주 고을에 어찌 호걸이 없겠는가. 집에 있을 때는 자제들을 가르치며 일깨워 효도를 충성으로 승화시키고, 관리로 나서게 되면 조정에서 공무를 성실히 수행해서 후세에 이름을 떨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이 점점 굳건해지고 교화를 베푸는 것에 도움을 준다면, 제주 사람으로서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정리 : 안창흡 기자

오문복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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