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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의 향기(3)원로에게 듣는다 - 素農 오문복 선생
오문복 | 승인 2016.02.25 10:55
   
 

역사문화의 향기, 素農 오문복 선생에게 듣고 정리한다. 한학자이며 향토사학자이신 서예가 오문복 선생은 잊혀져 가는 제주의 민속자료 정리와 고서 발굴, 번역 작업 등 향토사 연구에 바쁘시다.  素菴 현중화 선생의 제자로서, 서귀포소묵회 일원으로서 후학양성 등에 나서고 있다. <편집자 주>

구향교비(舊鄕校碑) 비문을 쓴 김처례(金處禮)는 문과 출신으로 시 짓기를 좋아하고 활도 잘 쏘았다. 병조참의, 평안도절제사 등을 지냈는데 1466년(세조11)에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제주 관노로 왔었다. 구향교비는 1466년(세조12) 봄에 쓴 것이므로 김처례가 제주 관노로 있을 때의 것이다.(제주유맥육백년사편찬위원회, 2000, 제주의 유학관련 자료와 시문선 참조)
 

향교를 처음 창건한 터는 관덕정 동측 중앙로터리(옛 한일은행) 인근으로 배불은 동산범골(舊校洞下校洞) 지경이었다. 향교성(鄕校成)이라는 기록에서 성(成) 뒤에 양(樣)자를 넣으면 그 뜻이 확연해진다. 번듯한 건축물을 일컫는다기보다 이미 존재했던 배움터에 향교로서 모양을 이루었다, 모양이 새로 만들어졌다, 격식을 갖추었다고 풀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주향교 대성전의 옛모습

당시 향교자리였던 현재의 일도1동에는 객삿골(客舍洞), 칠성골(七星洞), 생굣골생깃골(校洞), 막은골(저洞), 해짓골(海地洞), 산지목골, 한짓골,한질골(大路洞), 샛물골(間水洞)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이중에 생굣골생깃골 이름은 향교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졌다고 할 수 있다.(오창명 著, 제주도마을의 종합적 연구) 향교가 옮겨간 이후에 이곳은 일도리 구교동이라 불렸다.
 

일도1동에는 가락쿳내(가락천, 가락귀천)가 흘렀다. 오현단 바로 동쪽 냇가로 오늘날 산지천(山地川)을 이른다. 1582년(선조 5)에 내(가락천) 동쪽 고령밧 지경(현 운주당 부근)으로 향교를 옮겨 세웠다. 일반 민가 사이에 끼어 있을 뿐만 아니라 궁술 연마장과 마주 대하는 장소에 있는 것은 영예를 높이는 본뜻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고령밧은 고령개가 밭이 된 곳으로, 오현단 동쪽의 내 동편 일대를 이른다.(오창명 著, 앞의 책)
 

이후 1668년(현종9)에 가락천 서쪽 현재 오현로 제주은행 부근으로 옮겼다가 화재로 인해 1724년((경종4)에 다시 가락천 동쪽 옛터로 옮겼다. 1755년(영조31)에 터가 너무 낮고 습하다 해서 남문 밖 광양 땅 현재 삼성초등학교 인근으로 옮겨 세웠다. 그런데 향교가 위치한 장소가 비교적 높은 지대여서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세어 학문하기에 어려움이 컸다. 특히 문묘가 사방에서 바람을 맞는 모습은 좋지 않다 해서 용담리 비룡동(현 제주중학교)으로 옮겼는데 1827년(순조27) 이행교 목사 때의 일이다. 비룡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비룡못(현재 어린이놀이터 자리)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제주향교 지금의 명륜당 앞에는 말물(斗泉)이 있었다. 용담1동에는 용연동, 신교동, 동한드기(동한두기) 마을이 존재했다. 이중 신교동은 달리 새과양이라고도 불렀는데, 새로 향교가 이전해온 동네라는 뜻으로 현 제주중학교와 제주향교 일대 동네를 이른다. 180여년전에 세워진 향교의 의연한 모습은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게 하고도 남는다. 
 

현재 제주중학교 운동장 모두가 제주향교 울타리 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장의 동북편 현 서문공설시장과 마주하는 방향으로 대문이 났었다. 향교는 공자를 위시해 성현(聖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며 유학을 가르쳐 인재양성에 힘쓰며 민풍예속(民風禮俗)을 순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곧 성현에 대한 제향과 학생들에 대한 전인적 교육, 교화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중앙 교육기관이 성균관이라면 지방의 최고 교육기관은 바로 향교였던 것이다.
 

향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로 대표되는 제향공간과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구별되는 강학공간으로 나뉜다. 대성전에는 정위(正位)인 공자를 비롯해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5성(五聖)을 배향하고 16철과 한국의 유학자 18인의 위패 39위(位)를 모셔놓았다. 십육철(十六哲)은 공자의 제자 십철(十六)과 송나라 때의 육현(六賢)을 말한다. 십철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 (儒),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자장(子張)이다. 송대의 육현은 북송대(北宋代) 오현(五賢)인 주렴계(周濂溪), 소강철(邵翁), 장횡거(張載),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남송대(南宋代)의 주자(朱熹)를 일컫는다.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은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조헌(趙憲) 김집(金集) 김인후(金麟厚) 등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이중 정몽주는 숙종때인 1891년부터 배향됐다.
 

   
대소인하마비.

대성전의 정면 우측에 서무, 좌측에 동무가 나란히 세워졌다. 동무와 서무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 108위가 모셔졌다. 북측에 명륜당을 세워 그 앞에는 동재, 서재가 자리했다. 북측 울타리 쪽으로는 수선당과 악기고, 창고, 식당 등이 들어서 있었다. 명륜당은 뒤에 제주중학교가 설립될 즈음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 앞에는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가 세워져 있어서 성인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향교를 드나들 때에나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문복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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