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한파가 몰아친 지난 15일 제주시 한라생태숲에 봄의 전령사인 복수초가 눈 속에서도 노란 꽃을 피웠다고 한다. 혹한과 폭설로 점철된 올 겨울이 여느 해보다 길게 느껴졌던 터라 개화 소식이 여간 반갑지가 않다. 해마다 오는 봄이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이지만 얼음을 녹일 듯 위풍당당하게 피어난 샛노란 꽃망울을 보니 봄은 인간의 지혜가 만든 달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 속에서 먼저 찾아드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복수초는 입춘을 전후로 피어난다. 입춘은 봄으로 접어드는 절기로 24절기 중 새해의 시작을 상징한다. 이때가 되면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서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 곤충들까지 새로이 맞은 한 해를 구상하고 준비한다. 음력 정월에 해당하는 계절감은 여전히 춥지만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나오는 복수초는 복(福)과 장수(壽)를 기원하는 꽃으로 여겨진다. 꽃말이 지닌 뜻이 영원한 행복이라 하니. 봄을 부르는 꽃으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제주의 봄은 이렇게 봄의 기미를 가장 먼저 알아챈 복수초로부터 시작된다. 개나리와 벚꽃도 한잎 두잎 피어나고 있으니 제주에서 시작한 화신(花信)이 뭍에 오르면 전국의 산야는 알록달록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다.
 
 입춘 날 아침 광이 오름 오른다.
 양지바른 기슭에는 잔설 뚫고 피어난 얼음새꽃 봉오리들
 솜털 보송보송한 꽃병아리다
 그 너머 새봄 유치원 원생들 노란 모자 쓴 꽃병아리다
 얼음새꽃도 아이들도 멀리서보면
 걸어가는 단소(短簫)
 바람소리 새소리 몰고 가는 볼이 부풀 때마다
 소리 내고 싶은 대로 소리 내는
 입과 몸이 한 구멍이다
 온 몸을 넘나드는 피리 가락 속음(俗音)에 젖은 귀
 맑게 씻기며 제주바다로 뛰어 든다.
 흰 오선지에 푸른 음계 그리듯
 파랑주의보 내린 물굽이마다 동동 떠내려간다
 겨울 속, 웅크려 있는 나를 데리고
 제주 바다 건너는
 봄이란 말은 입술 근처까지 해를 불러낸다는 말
 숭숭 구멍 난 내 마음 속 낡은 피리를 꺼내든다
 터지고 갈라진 구멍마다 햇살 드나든다
 얼음새 된 꽃병아리야
 맨도롱 또똣헐 때 재기재기 건너가라
 얼어붙은 입이 풀리는 오늘부터 봄이다
 나도 온몸으로 소리친다
 -졸시무공적(無孔笛)의 봄전문
 

신이 만들어낸 색깔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색깔만 골라 입는 계절이 봄이다. 개나리, 산수유 등, 봄을 밝히는 색깔로는 노란색이 단연 으뜸이다. 제주의 봄을 대표하는 유채꽃은 관광객의 눈을 사로잡은 지 이미 오래다.
 

노란색은 자신감을 주고 낙천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운동신경을 활성화하고 에너지를 생성케 한다고 하니,봄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색이다. 광이 오름 여기저기 피어난 복수초와 신명나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무공적(無孔笛)을 생각한 것도 노란색이 주는 산뜻한 색감 탓인지 모른다.
 
고려시대 걸출한 선사(禪師)인 나옹화상의 토굴가에 보면,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무공적(無孔笛)을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라는 글귀가 있다. 
 

 무공적(無孔笛)은 여기에서 유래된 말로써 구멍 없는 피리를 말함인데 깨달음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구멍 없는 피리는 불 수 없지만 얼어붙은 땅에 피어나는 복수초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불가능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모습을 지닌다. 봄을 부르는 입과 몸이 한 구멍인 이미지를 지닌다. 즉 구멍이 뚫리지 않는 피리인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제 각각의 소리와 형상을 품는다. 그 소리와 형상이 인간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그 속에서 인간은 깨달음을 얻었다.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건  만물을 서로 소통시키는 봄이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웅크려 있던 마음을 열어 무공적의 피리를 불어보자. 얼어붙은 입술을 녹여 희망을 불러내보자. 얼음 뚫고 피어난 복수초처럼 봄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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