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집 앞 정류장에 나갔다가 봄을 만났다. 길을 가던 올레꾼이 이렇게 따뜻한 날은 무조건 걸어야 한다고, 말을 건넨다. 올레꾼 따라 몇 시간 걸어볼 생각이었는데 아부오름 가자는 전화가 온다. 서울에서 내려온 모 시인의 전화다. 택시를 불러 타고 약속장소인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늘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서 오름 가는 일이 쉽지 않은 터였다. 우연히 횡재한 기분이 든다. 오름과의 첫 만남, 설레는 마음으로 송당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몇 시간 헤매어도 찾지 못한 사람도 있댕 햄수다. 이 길로 곧장 갑서"


 지도를 들고 찾아가는 길, 기사 분께서 안내 말과 함께 호젓한 시골길에 내려준다. 길가에 늘어선 삼나무들이 의젓하게 반긴다. 어서 오시라고, 밭둑가에 몰려 서 있는 갈대들이 연신 손을 흔든다. 제동 목장 표지가 보이고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아부 오름은 앞 오름이 정확한 이름이다. 앞 오름이 아부 오름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오름을 앞에 두고도 한참 찾는다고 한다. 아부는 앞의 변음으로 마을의 앞쪽에 있는 오름을 뜻 한다고 한다. 아버지 오름에서 변한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아부는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하는 제주방언이다.


 그래서인가 멀리서 바라보는 아부 오름은 산 모양이 둥글고 한가운데가 타원형 굼부리를 이룬 것이 마치 어른이 좌정한 모습 같다. 오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팽나무가 먼저 맞아준다. 서쪽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오름 둘레를 타고 노끈으로 만든 산책로가 폭신하다. 멍석을 밟는 느낌이다. 촉감과 감촉 사이에 놓인 길이라고 미소 짓는다. 산책로 주변에는 소나 말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쳐 있다. 그럼에도 말발굽처럼 생긴 똥이 산책로 길에 널브러져 있다. 음... 이 똥의 주인은 너구나 말!

 전 사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능선 안을 바라보니 크고 넓은 원형의 대형 분화구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연상시킨다. 화구 안에는 띠를 두른 것처럼 삼나무들이 조림되어 있다. 분화구 주변에도 삼나무가 둥글게 심어져 있다. 1901년 일어난 제주민란을 소재로 한 영화 《이재수의 난》(1999)을 촬영한 곳으로 삼나무 울타리는 그 때 심어졌다 한다. 멀리 백약이오름, 좌보미오름, 한라산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름 모를 크고 작은 오름이 눈앞에 진열된다. 오름의 바다다! 한라산이 오름의 어미란 걸 말하지 않아도 알 듯 하다. 새끼들을 품고 젖을 물리는 모습이 확연하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杉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 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 소가 갓 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소떼의 느린 걸음이 젖어 돌아오는 그 때,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저 곳이라는 듯 붉은 목젖이 서녘을 필사한다
 달이 어째서 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 두 손 곧추 모아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일생이 어두운 혀가 서쪽에서 돋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미처 둘러보지 못한 동쪽을 갸웃거리는 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몰라도 좋았다 
 - 졸시 <돋아나는 서녘> 전문

 

 정토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理想鄕)이다. 이른바 극락세계이다. 아부오름을 보는 순간 정토가 떠오른 것은 부처와 중생이 어울려 사는 극락의 모습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서다. 가까이는 소와 말이 자유롭게 목초를 먹는 모습 속에서 멀게는 크고 작은 오름이 평화롭게 놓여 있는 정경 속에서 단란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소나무 가지에서 까치 몇 마리가 일몰의 태양 속으로 힘차게 날기 시작한다. 둥지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모른다. 아버지 오름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나의 극락은 따뜻하고 안온했던 아버지의 품속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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