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 素農 오문복 선생

역사문화의 향기, 素農 오문복 선생에게 듣고 정리한다. 한학자이며 향토사학자이신 서예가 오문복 선생은 잊혀져 가는 제주의 민속자료 정리와 고서 발굴, 번역 작업 등 향토사 연구에 바쁘시다.  素菴 현중화 선생의 제자로서, 서귀포소묵회 일원으로서 후학양성 등에 나서고 계시다. <편집자 주>

 

대정향교는 1416년(태종16) 정의, 대정 양현이 설치되는 해에 건립됐다는 주장이나 1420년(세종2)에 처음으로 현성 안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처음에 대정현 북성 안에 건립되었던 향교는 동문 밖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서성 밖에 이건했다. 이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1653년(효종4) 이원진 목사 때에는 향교 자리가 너무 비좁다는 판단에 따라서 현재의 단산 밑 지경(서귀포시 안덕면 향교로 165-17)으로 옮겨 세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1669년(현종10) 이인 목사 때 권문혁 현감이 대성전을 중수했고 1688년(숙종14) 이희룡 목사 때에도 중수됐다. 1752년(영조28) 이관 현감은 명륜당과 전사청, 서재 등을 중건했고 1835년(헌종원년)에 목사 박장복이 대성전을 중건했다.

 특히 향교 안에 남아 있는 글씨체가 이채를 띤다. 명륜당(明倫堂) 편액은 1811년(순조11) 변경붕(邊景鵬) 현감이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현판했다. 훈장 강사공(姜師孔)은 사재를 털어 헌관제례복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성전 앞뜰에 노송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식재했다고 전한다. 동재에 걸린 의문당(疑問堂) 편액 글씨는 추사체로 유명하다. 1846년(헌종12) 훈장 강사공이 대정현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에게 청하여 받은 글씨이다. 강사공은 대정향교 훈장이자 학자요 문인이다. 추사 김정희와 교류한 석학으로 일재(一齎) 변경붕과 함께 대정의 학문과 미풍양속 진작의 중추적 역할을 한 선비였다. 대정향교 훈장으로 재임하면서 서귀포 지역 유림 발전에 힘썼고, 문장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한국학중앙연구원 刊,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참조)


 현재 제주추사관에 보관되어 있는 편액 원본을 살펴보면, 『道光二十六年(헌종 12, 1846) 丙午十一月 日 晋州後人姜師孔 請謫所前參判金公正喜 題額謹揭 刻字鄕員吳在福 孔子誕辰二四七九年 戊辰春 東齋重建謹再揭]』(疑問堂 懸額 解題文)라 씌어 있다. 목각한 이는 향원(鄕員:향소鄕所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 오재복임을 알 수 있다. 의심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학문하는 공간인 향교에 걸맞는 제액이라 할 것이다.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의심하여 묻는 데 있다는 이치를 깨우쳐주기 위한 추사 선생의 가르침이 배어 있어서 사뭇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석문 제주 교육감의 '2016년 제주교육은 질문이다'는 선언이 의문당(疑問堂) 편액과 오버랩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하며 답을 찾아갈 때,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의 꿈과 끼, 미래의 가능성이 미래의 진로로 이어질 수 있는 교육적 토대를 만들어 가겠다"는 교육감의 발언 역시 이와 같은 선현의 가르침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대정향교 밖으로는 외성(外城)이 둘러져 있다. 동남, 서남 방향에 동정문(東正門)과 대성문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북향의 명륜당이 마주 보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세워졌다. 가운데 큰 대청이 자리하며 그 앞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와 서재 앞쪽으로는 한 단 높게 내성이 둘러져 있으며 그 가운데로 내삼문이 나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이 자리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여덟 팔八자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 앞 뒤쪽에서 보면 갓을 쓴 것과 같은 모양, 옆에서 보면 사다리꼴위에 맞배지붕의 박공을 올려놓은 모양. 중요하고 위엄 있는 건물에 사용하며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지붕 형태)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그 내부는 통 칸으로서 장방형 평면을 이룬다.

 대정향교가 자리한 곳은 단산(바굼지오름) 남사면이다. 바굼지오름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와 인성리 중간지점, 두 행정구역 경계에 걸쳐져 있다. 표고 158m, 비고 약110m, 동서로 길게 누어있는 형태를 띤다. 옛날 산야가 물에 잠겼을 때에 오름이 바굼지(바구니)만큼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전설에서 바굼지오름이라 칭하고 뒤에 한자표기로 소쿠리 단(簞)자를 써서 단산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박쥐의 옛말 바구미에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오름 모양이 마치 날개를 편 박쥐 모양 같다는 면에서 그럴듯한 해석으로 인식된다. 향교 밖 서녘 길가에 석천(石泉)이라 이름난 속칭 새미물이 이다. 산기슭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이다. 옛날 대정현 성 안의 물이 말랐을 때에는 이 샘물을 길어다 썼고 수도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사계리 마을에 공급되던 수원이었다.(김종철 著 『오름나그네』 인용)


 대정향교 서측은 용천수로 급수가 풍족하며 북쪽은 단산으로 길게 에워싸이고, 동쪽으로 산방산이 우뚝, 남쪽 방향에는 평야지대와 함께 멀리 남태평양 푸른 물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형이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옥같이 깨끗한 여자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는 뜻) 명당이라 했다.(濟州儒敎發展史 참조)


 
 정리=안창흡 기자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