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 소설은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운 여성의 이야기다. 바꿔 말하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할 수 있게 된 여성의 이야기인 셈이다. 아니면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이 지워진 여성의 이야기다. 어쨌든 자기 자신의 나이도 잊어버릴 정도로 불완전한 기억력을 고백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래서 소설의 서사는 ‘아마’와 ‘어쩌면’ 사이의 세계에 걸쳐져 있다. 흐릿하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확실하고 뚜렷해보이는 것이 있다. 주인공(‘나’)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유독했다. 중독되어 헤어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녀가 친구와 독을 먹고 죽은 쥐들을 가지고 놀았듯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의 죄수’와도 같은 그녀의 사랑은 그녀 자신과 그녀의 연인 프란츠를 가지고 놀았다. 그녀는 ‘사랑을 자제하도록 하려는 나의 시도들은 번번이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고, 매번 사랑의 계획에 복종해야 할 뿐 다른 것은 없다고 가르치며 또다시 더 큰 굴욕만을 내게 남겼다’며 사랑에 관해서 자신은 속수무책이었음을 자백한다.

자신의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본 사람들은 안다.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기억력을 잃은 소설 속의 ‘나’는 그 유용성으로 쌓아올려진 지층 속에 숨어 숨 쉬는 화석과도 같다. 길이가 30m에 가까운 거대 초식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무엇을 은유할까. 통일 직후의 독일이라는 기이한 시대일까. 나이를 먹으면서 잃어버린, 터질 때까지 부풀어 오르는, 멸종된 ‘청춘의 사랑’일까.
 통일 직후의 베를린이 주 배경인 이 유독한 사랑 이야기는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남성성을 강제하고 여성성을 왜곡하는 장면들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구토하면서도 꾸역꾸역 반강제적으로 삼켜온 남성성과, 본모습이 심각하게 왜곡된 여성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이 사회 역시 브라키오사우루스의 한 모습이라는 듯이.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슬픈 짐승’일 수밖에 없다는 듯이.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