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봄은 인간이 자연에 작용을 가하면서 이 자연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계절이다.


 엊그제 샛바람이 불더니 봄이 완연한 자태를 갖추었다. 여기저기 꽃 축제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효돈 마을 앞, 도로 변에 늘어선 백목련 나무는 수천마리 흰 새가 내려앉은 듯 활짝 피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하늘거린다. 풀꽃들도 벌써 피어, 저들끼리 봄 잔치가 한창이다.


 옆집 아주머니는 귤나무 가지 치는 틈틈이 잡초 제거며 상추, 쑥갓, 부추, 무, 배추 같은 씨앗을 뿌리느라?일손이 바쁘다. 햇살의 온도만큼 발돋움하던 마당의 잡초들도 키 재기를 한다.


 봄은 그렇게 이목구비를 지닌 손을 기다리며 무르익는 중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그의 저서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노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이 인간의 고통과 궁핍함을 없애 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인 현재에도 노동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삶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는 것이다 라고 한 루소의 말은 삶의 의미가 일하는데 있다고 역설한다. 일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속담 역시, 동일한 뜻을 내포한다.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기관은 무엇일까, 손이다. 행위의 주체이자,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직접적인 도구로써 가장 지체(肢體)중의 지체다,

 
 비워 두었던 집을 찾아간다
 무성하게 자란 시간이 나를 기다린다
 그 시간을 좇는 일이 근황이라면
 나의 근황은 몸 밖으로 난 잡초 뽑는 일
 코 앞 잡초 외엔 어떤 세상도 보이지 않고
 어떤 빛깔도 사라지는 것이어서
 잡초 뽑는 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손이 몸의 주체가 되는 그 때
 손은 생명을 관장하는 신(神)이어서
 잡스런 희망과
 죽을 듯 피어났던 절망이 뽑혀 나가고
 열망에 지친 이마를 빛나게 한다
 잡초인지 아닌지
 분별 못하는 눈이 밝아진 것은
 흙투성이 손에 닿은 그때 쯤
 잡초인줄 믿고
 풀꽃을 낚아챌 때도 있지만
 생각만으로도 마당이 환해질 때가 있다
 잡초를 볼 때마다 손을 내미는
 내 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일까
 구부리고 앉아 잡초를 뽑다보면
 손이 먼저 나를 뽑아낸다
 손이 먼저 나를 솎아낸다
 - 졸시 <손에 닿다> 전문

 손의 유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잣대가 된다. 침팬지류나 곰 같은 영장류 동물들에게도 손이 있다고 하지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앞발에 불과하다.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킨다. 손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잘못 쓰면 흉기가 되기도 하는 손, 일하는 손은 그래서 값질 수밖에 없다.
 

 일하는 손 중, 가장 아름다운 손은 어머니 손이다. 거칠고 주름투성이의 어머니 손이 섬섬옥수 보다 아름답다는데 의의(疑意)를 달 사람을 없을 것이다. 초라하지만 거룩함마저 자아내는 손, 평생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온 그 손이야말로 노동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손이다. 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신성(神聖)을 지녔으니 말이다. 상경하면 가족을 돌봐야 하고 내려오면 비워두었던 집을 보살펴야 하는 나에게도 손은 귀중하다.


 기도는 하늘의 축복을 받고 노동은 땅에서 축복을 파낸다. 기도는 하늘에 차고, 노동은 땅에 차니, 이 둘이 당신의 집에 행복을 실어다 준다는 몽테뉴의 말은 내 손을 바쁘게 한다.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거나 빈 집을 살뜰히 가꾸어야 하는 노동의 역할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두 손이 있음을 감사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잡초를 뽑는다. 코앞 잡초를 뽑을 일 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순간이다. 몰입과 집중을 하다 보면, 내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손을 깨닫게 된다. 나의 실수가, 나의 과오가 남에게 누가 되지 않았는지, 잡초처럼  마구잡이 삶을 살았던 건 아닌지, 신(神)의 이름을 지닌 그 손에 닿게 된다.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힌다. 마당이 환해지고 잡초로 우거졌던 마음에 봄이 가득 들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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